지난 한 세기를 풍미한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소천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여기서 굳이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한 매체는 그를 “북미 복음주의 기독교의 얼굴을 바꾼 인물”로 평했다. 칭찬에 인색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조차 “위대한 빌리 그레이엄”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수식어 ‘위대한’의 철자로 모두 대문자(GREAT)를 사용함으로써 존경심의 강도를 높였다.
지도자가 훌륭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역량과 영향력의 크기만큼 떠난 자리의 공백도 커진다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소위 ‘거물’의 서거 이후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메울 대체 인물이 없음을 탄식하면서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갈망한다.
지구촌 기독교에 ‘제2의 빌리 그레이엄’이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은 한국교회에도 그런 큰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지 여부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거물의 부재에 있지 않다. 현대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는 특정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침소봉대하고 우상화하는 데 있다. 요즘 우리를 당혹케 하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에 바로 거물의식의 환상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일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손에 달린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빌리 그레이엄처럼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마땅히 존경해야 하지만 숭앙의 대상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적용하는 게 맞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제자도의 이치가 바로 여기 있다. 평범하다 못해 허접해 보이기까지 한 제자들에게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맡기고 훌쩍 떠나신 예수님의 제자도를 현대교회는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우리는 왜 끊임없이 종교적 거물들을 추구하는가. 850명의 이방 제사장과 맞서 승리한 엘리야가 위대한가, 위대한 일에 엘리야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한가. 대단해 보이는 엘리야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사람이라고 평가한 야고보의 일갈(약 5:17)을 경청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개혁운동도 이런 깨달음과 맞물려 있다.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위대함이 사람과 물건에 오·남용되면서 성자숭배와 무속적 성물의 악취로 가득한 중세 암흑기가 연출됐다. 개혁자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적폐를 청산하고 바로잡았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교황이나 성직자들이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해 그분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의 뿌리가 바로 개혁자들이 외친 만인제사장 원리였다.
세상도 이 성경적 원리를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탁월한 지도자의 존재 여부가 조직과 기업의 성패를 가른다고 여기던 관행적 생각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수년 전 스탠퍼드 경영학자들에 의해 소개됐다. 지도자가 지나치게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경우, 지도자 의존성이 높아지면서 장기적으로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향을 100년 이상 지속된 단체들과 기업들의 심층 연구를 통해 밝혀낸 것이다.
탁월한 지도자에 의존하기보다 보통사람들이 대물림하는 단체나 기업이 건강하게 지속된다는 이 원리를 주님은 제자도를 통해 이미 2000년 전에 가르쳐 주셨다. 필자는 계속 빌리 그레이엄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사용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 위대하신 하나님만을 숭앙하고 예배할 것이다. 제2의 빌리 그레이엄이 나타나도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평범한 우리를 통해 이루실 그분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기 때문에.
정민영(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시온의 소리] 빌리 그레이엄을 넘어서
입력 2018-03-02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