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10대 시절 성폭행 당한 여성 어두웠던 그 시간에 작별 고해

입력 2018-03-02 00:01

‘누군가 내 안의 성역을 침범하고 무참히 짓밟았을 때….’ 2005년 등단한 소설가 최형아의 첫 장편 ‘굿바이, 세븐틴’은 이때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열일곱 살 소녀 윤영은 비가 오던 어느 밤 귀갓길에 남학생 4명에 집단성폭행을 당한다. 성폭력은 여성에게 자신의 몸이 처참하게 유린되는 경험을 뜻한다. 소설은 성폭력에 대한 얘기다.

“자기 안의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뭔 줄 아세요? …그것을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게 깨끗해지죠. …아무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청소년기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희진이 윤영에게 던지는 말이다. 희진 역시 입양된 오빠에게 10대 후반 성폭행을 당했다.

두 사람의 경험은 비슷했지만 윤영과 희진이 그 사건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달랐다. 윤영은 복수를 택했다. 애송이 남자들을 꾀어 잠자리 직전까지 애를 태운 뒤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원 나이트 스탠드’. 하룻밤 자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소녀를 잊고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윤영은 사랑 없는 일회적 사랑에서 펄펄 날았다.”

희진은 자기혐오에 빠진다. 어린 나이에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기 몸도 인생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코를 높이고 턱을 깎고 가슴을 키우고…. 그러다 윤영이 의사로 일하는 여성전문 성형외과 ‘올리메이드’를 찾는다. ‘성감 향상을 위한 질 레이저 성형수술’을 위해. 그런데 웬일인지 희진은 윤영을 수시로 찾아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다. 성폭행을 당한 경험까지. 윤영은 희진을 만나면서 차츰 자기도 희진처럼 자신을 혐오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말은 그 어두운 열일곱 살의 시간에 작별을 고하는 의식이다.

작가는 “튼튼한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많은 여성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매일 밤 소설 속의 그녀를 불러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져보았다”며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아주 느리고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성폭력을 고발하는 최근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이지만 작가는 세밀한 심리 묘사와 독특한 이야기 구조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미투’를 택한 여성들을 응원한다.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