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꼬리표 따라 탕감 희비 논란

입력 2018-03-01 05:05

‘기금’에 몰려 있는 빚은 1000만원 넘으면 면제 안돼
빚 2000만원이어도 민간에 1000만원 분산되면 탕감
일률적 기준 탓 형평성 논란


이모(72)씨는 1999∼2006년 은행 4곳에서 약 3000만원을 빌렸지만 형편이 어려워 이제껏 갚지 못했다. 최근 정부가 장기소액연체자의 빚을 탕감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국민행복기금에 문의했지만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씨의 경우 채권 4개가 모두 국민행복기금에 넘어와 ‘채권액 1000만원 이하’라는 지원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진 개별 빚은 모두 1000만원 이하다. 만약 이씨 관련 채권 중 하나만 기금에 매각됐다면 해당 빚은 면제될 수 있었다. 채권 소속, 즉 ‘빚 꼬리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셈이다. 이씨는 “채권이 국민행복기금 내부에 몰려 있는 사람과 내외부에 걸쳐 있는 채무자는 지원받을 기회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6일부터 장기소액연체자의 빚 탕감 신청 접수가 시작된 가운데 채권 소속에 따라 지원 대상 여부가 달라져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채무자의 실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인 지원 기준을 정한 게 문제라고 본다.

28일 금융 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11월 사회적 약자의 재기지원을 위해 ‘원금 1000만원 이하, 연체 10년 이상’의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발표했었다. 탕감 대상 조건에 맞는 채권이 국민행복기금 내에 있으면 정부가 일괄 소각한다. 채권이 은행 대부업체 등 국민행복기금 외부에 있는 경우 민간 금융회사가 출연한 재단법인이 사들인 후 정리한다.

문제는 빚 탕감 대상자를 선정할 때 필요조건을 국민행복기금 내부에 있는 빚과 민간 금융회사에 있는 빚에 각각 적용한다는 점이다. 상환능력이 없는 채무자가 국민행복기금 내 빚이 1000만원 있으면서 민간 금융회사에도 빚이 1000만원 있다면 총 2000만원의 채무가 탕감된다. 그러나 빚이 이보다 적은 1100만원이라도 국민행복기금 내부에만 있거나 외부에만 몰려 있으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채권에 소속 꼬리표가 달리게 된 건 국민행복기금이 2013년 원금 1억원 이하, 연체 6개월 이상의 채권을 일괄 매입하면서부터다. 당시 조건이 맞지 않아 연계기관이 내놓지 않은 채권은 사지 못했다. 즉 국민행복기금이 자신의 채권을 얼마나 사들였는지에 따라 ‘빚 굴레 탈출’의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다.

금융 당국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국민행복기금 내 채권은 이미 정부가 산 채권이고 외부 채권은 앞으로 사야 하기 때문에 정책 시행 편의상 나눈 기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군희 서강대 교수는 “빚 탕감 정책을 시행할 땐 형평성을 담보하는 정교함이 중요한데 현재 정부는 일괄적 기준을 정해 무차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며 “결국 일시적인 지원 정책보다는 채권의 소멸시효를 줄이는 등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정부는 큰 틀에서 방침을 정하되 세세한 지원 기준은 민간 재단 차원에서 채무자들의 실제 상황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