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끊임없는 고통… 전담병원도 응급피임 등 도움 외면

입력 2018-03-04 20:02

성폭력 피해자는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까. 미투 운동(#Me Too)으로 성폭력 피해 고발이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성폭력 피해자의 의료 접근성은 턱없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행(강간) 피해 이후에는 가능한 한 72시간 내로 증거를 채취하고, 피임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물이 소실되고, 임신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응급(사후)피임약은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게는 필수 의약품이다. 이 약은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하는 것을 방해해 원치 않는 임신을 막는 피임제로 성관계 후 12시간 이내에 복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95%)가 좋고, 늦어도 72시간 내에는 복용해야 효과(42%)를 볼 수 있다.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복용해야 하지만, 전문의약품으로 의사의 진단이 필요하다. 때문에 정부는 성폭력 피해 등 위급상황 시에는 종합병원 이상 응급실에서도 약을 처방·제조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가 지정하는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조차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쿠키뉴스 취재 결과 가톨릭계열의 다수 의료기관이 응급(사후)피임약 처방을 자체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도 응급(사후)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 방침을 유지함에도 몇몇 병원은 버젓이 ‘성폭력 피해 전담 의료기관’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성폭력 피해자 조치와 관련해 여성가족부가 지정한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 중 한 곳인 가톨릭 계열 A대학병원 관계자는 “낙태와 피임을 반대하는 천주교 재단이라서 응급피임약 처방이 안 된다”며 “응급실 처방이 안 되고, 담당 진료과에서 진료를 받더라도 약 처방은 어렵다”고 말했다. 또한 경기도 인천의 B대학병원의 경우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하는 ‘해바라기센터’를 위탁 운영 중이다. 그런데 이 병원은 가톨릭 교리를 이유로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으며, 강간으로 인한 낙태 시술도 하지 않는 곳이다. 해당 해바라기센터 관계자는 “병원에서는 종교특성상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다. 센터로 이관돼 상담을 받고 강간피해를 신고(고소), 증거채취를 진행해 피해가 확인된 분에게는 처방할 수 있다. 강간 낙태는 하지 않고 다른 병원에 연계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성폭력 피해자들을 보듬는 의료기관은 드물다. 수익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하고, 자칫 낙태죄에 연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성폭력 전문 상담가들은 한 목소리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의료기관이 태부족하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안양 지역의 경우 지난해까지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이 2곳이었지만, 최근 1곳이 전담기관 지정 취소를 요청했다. 안양여성의전화 관계자는 “병원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려는 의지가 크지 않다. 수익사업은 아닌데 제반 과정이 많아 부담스러워 한다. 1곳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매년 1000건 이상의 성폭력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김진선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생명존중사상이나 성문란을 염려해 응급피임약을 반대하는 논리는 말도 안 된다. 피임약은 말 그대로 임신을 예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며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는 결코 적지 않다. 시기를 놓치면 임신가능성이 높아짐에도 피임약 접근성은 매우 떨어진다. 특히 청소년, 저소득층, 장애아동 등 취약계층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해바라기센터, 여성긴급전화 1366 등을 운영·지원하고 있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만 도움을 주고 있어 실효성이 의심되고 있다. 또 앞서 지적한대로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은희 상담가는 “해바라기센터는 ‘원스톱’을 표방하지만 제약이 크다. 피해자가 고소를 결정한 경우가 아니면 증거채취, 사후피임약 제공을 해주지 않는다”며 “당장 고소할 마음이 없더라도 방문 시 증거채취를 해두면 나중에 고소할 용기가 생겼을 때 도움이 되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민간상담기관으로 다시 오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송과정은 고단하지만, 처벌이 보장되지 않고, 또 가해자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악용해 보복성으로 고소로 맞서는 경우도 있다. 최근 번지는 미투 운동에서는 학교, 직장 등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침묵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례가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해바라기센터 등 공공기관의 도움조차 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 권익지원과 담당자는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은 희망하는 의료기관과 보건소를 대상으로 일정 기준에 부합하면 지정한다”며 “일부 전담 병원이 종교적 이유로 응급피임약 처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사안이다. 확인해보겠다”고 답했다.

전미옥 쿠키뉴스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