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시간에 집착해 온 문화인류사 담아내

입력 2018-03-02 05:00
영어 단어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명사는 무엇일까.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조사에 따르면 ‘시간(time)’이다. 시간의 범주에 드는 해(year)는 3위, 날(day)은 5위, 삶(life)은 9위, 달(month)은 40위. 이 정도면 언어생활이 시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다. 언어생활뿐이랴. 많은 이들이 시간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는다. 시간을 빼놓고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 대체 시간이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랬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 설명하려면 알 수가 없다.”

인문학자인 저자는 팔꿈치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한 뒤 시간이 느리게 가는 생생한 경험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로 했다. 그의 지적 탐험은 풍성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독자들을 매혹적인 탐험의 길로 끌어들인다. 그 길을 좇다 보면 인간의 시간에 대한 강박적 집착,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갈망이 차츰 퍼즐을 맞춰 가게 된다.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는 분야는 음악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예술인 음악을 담아내는 게 시간이다. 형체 없이 사라지는 시간의 실체를 음악이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시간과 음악은 단단하게 서로 묶여있다. 시간을 고찰하면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20세기 이후 음악에서 시간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음악을 담아내는 장치와 녹음 기술이 음악의 분량을 결정하기에 이르면서다. “3분이라는 팝송의 길이는 작곡가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녹음 시간의 한계로 생긴 현상이다.” 이에 순응한 이들도 있었지만 결사반대한 음악가들도 있었다. 음악과 시간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시간의 역사를 다루는데 필리버스터가 빠질 순 없다. ‘시간과 싸우는 설전’으로 설명된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은 미국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가 세웠다. 1957년 8월 민권법 제정을 막기 위해 무려 24시간18분 동안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책에는 필리버스터의 역사,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필리버스터 기록들에 대해 적혀 있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을 영원히 잡아둘 수 있는 사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 순간을 격렬하게 느끼게 하는 기록경기, ‘지구종말시계’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고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전문 지식이 함께 다뤄지면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틈틈이 배치해 놓은 작가의 위트가 무거워진 독서의 시간을 가볍게 환기시켜준다. 이런 식이다. “이 시계는 착용자로 하여금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며, 그와 정반대로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바, 이런 특별한 느낌을 얻게 하는 이 시계를 사려면 7억129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 직후부터 12년간 쓰인 신개념 달력 ‘공화력’과 하루를 10시간으로 나눈 ‘10진법 시계’에 대한 서술에는 작가의 유머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특히 술술 읽힌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