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어난 3·1운동의 파장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중국 신문·잡지의 대대적 보도로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알려지면서 중국의 항일운동인 5·4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도중국선교연구소 문영걸 소장은 28일 당시 중국의 언론보도를 상세히 분석한 ‘중국 신문 속의 3·1운동’을 기독교사상 3월호에 발표했다. 국내 언론이 아니라 중국 언론에 비춰진 3·1운동의 내용 및 평가를 상세히 분석한 자료는 처음이다.
당시 베이징뿐 아니라 상하이(上海), 톈진(天津)의 주요 일간지들은 3월 5일부터 앞다퉈 관련 보도를 싣기 시작했다. 신문의 정치적 성향이나 노선은 달랐지만 이들은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두 달 동안 관련 보도를 수십 건씩 쏟아냈다.
총 104건의 기사를 쏟아낸 상하이 ‘민국일보’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민국일보는 독립선언서 전문도 게재했고 ‘앞사람이 쓰러져도 뒷사람이 이어가는 한국인’, ‘한국인들이 어찌 쉽게 굴복하랴!’ 등의 보도를 통해 3·1운동을 지지했다. 베이징의 ‘신보’는 ‘부끄럽구나’라는 논평을 내며 한국에 못 미치는 중국의 현실을 탄식했다.
문 소장은 “당시 중국 언론의 보도와 논평은 그 범위가 넓고 수량이 많아 한국 현지 언론을 방불케 했다”며 “3·1운동의 실황을 보도할 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 대한 논평을 통해 한국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했다”고 분석했다.
기독교사상 3월호에는 또 천주교에서 발행하던 중국의 ‘익세보’ 3월 27일, 28일자 보도 내용도 소개됐다. 특히 평양의 3·1운동 현장에서 빛났던 목회자들의 활동상이 눈길을 끈다. 평양 장대현교회 옆 공터에서 진행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에서 김선두 목사는 “여러분의 행동이 정의로 말미암아 수난을 당한다고 하면, 정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여 수난을 당한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라며 이들을 격려했다.
정일선 장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강규찬 목사가 설교했다. 신문은 강 목사의 설교문을 상세히 실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한국이 독립을 선포한 날입니다. 우리 2000만 동포의 자자손손은 이날을 노래와 춤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정신 차리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여 자자손손의 생존을 도모하는 길입니다. 구차하게 한순간의 삶을 도모하고 개인이나 가족을 돌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유를 찾다가 희생되는 것이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백 배 낫습니다.”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번하이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을 봉독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식을 개회했다”며 “김 목사는 당시 정일선 장로와 함께 만 1년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30일 만기로 석방됐다”고 전했다.
이번 호를 기획한 기독교사상 김흥수 주간은 “3·1운동 정신을 우리만의 시각이 아니라 재판, 중국의 유이민 소설, 중국 언론 등을 통해 다양하게 돌아봤다”며 “3·1운동의 정신을 기독교 시민운동의 정신적 바탕으로 삼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숨은 기독교 항일운동을 찾아서] “앞사람이 쓰러져도 뒷사람이 이어가는 한국인”
입력 2018-03-0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