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 엄마의 울분, 예상은 끊임없이 깨진다 [리뷰]

입력 2018-03-01 00:10
냉정한 세상 속 홀로 정의를 외치는 엄마의 외로운 사투를 그린 영화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내 딸이 강간당하다 죽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월러비(경찰서장)?”

미국 미주리주 작은 시골마을, 인적이 드문 2차선 도로 옆에 놓인 세 개의 낡은 대형 광고판에 이토록 도발적인 문구가 내걸린다. 7개월 전 딸을 잃은 엄마 밀드레드 헤이즈(프란시스 맥도맨드)의 피 끓는 외침. 그러나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 주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이쯤에서 관객은 속단할지 모른다. 무능한 공권력을 고발하는 흔한 이야기이겠거니. 혹은 범죄 피해자의 주변인들이 겪는 고통에 관한 내용이겠거니. 그러나 영화 ‘쓰리 빌보드’는 그런 일차원적 예측들을 곧바로 무력화시킨다. 선과 악이 대립하고 끝내 선이 승리하는 식의 단선적 구조는 이 영화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부터 모호하다. 예컨대 고발의 대상이 된 경찰서장 월러비(우디 헤럴슨)는 사건 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뛴 장본인이다. 그를 따르는 부하 딕슨(샘 록웰)은 다혈질의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한편으론 ‘꽤 괜찮은’ 경찰이다. 심지어 모성애 강한 엄마 밀드레드조차 딸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섣불리 누군가를 지지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선입견이나 예상은 끊임없이 깨부숴진다. 전형적인 인물이나 전개를 찾기 어렵다. 비극적인 장면마다 여지없이 유머가 치고 들어오면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완성한다.

이 영화를 채우는 정서는 미움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범인을 향한 증오뿐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곳곳에 자리한다. 상황에 의해 움튼 분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가는데, 그 끝에선 결국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단순한 여성 복수극에 그치지 않는다. 성별을 초월한 인간의 근본에 대해 성찰한다. 골든글로브 작품상에 이은 유력한 오스카 후보작. 오는 15일 국내 관객을 만난다. 115분. 15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