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미국에 예고한 미주 항일독립운동가 한길수 사관은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미주 최초의 한인 구세군 사관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 사관에 관한 사료 발굴에 여념이 없던 황선엽 구세군역사박물관장으로부터 지난 26일 한 사관의 일생을 들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있기 8개월 전,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중한민중동맹단 대표였던 한 사관은 일본의 기습공격을 미국 정부에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해 10월 헨리 스팀슨 미국 전쟁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이 마셜군도 등에 무기를 비축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12월에는 미 국무부를 찾아가 일요일에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모두 재미 일본 영사관에 위장 취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사관은 1944년 해외 최초로 ‘Korea’라는 명칭이 표기된 우표를 미 우정국에서 발행토록 청원했고 1945년 50개국이 모인 유엔 창립총회에 한국인으로 처음 참석했다. 하지만 1900년 경기 파주시 장단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던 그에게 관심을 두는 한국인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어린 나이 이주해 미국인과 같은 사고를 했지만 한 사관은 끊임없이 한국의 자유를 갈망했다. 구세군에서 사역하며 미국 주류사회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 1921년 샌프란시스코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와 콜로아의 구세군영문에서 한국어로 된 예배를 드렸다.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에게는 기술과 사회, 한글을 가르쳤다.
1926년 사관은 하와이 교포신문사인 ‘국민보’ 기자가 된다. 교포대회에서 시가행진하며 한국의 자유를 주장했다. 구세군 보건의료 지원 사업에도 참여한다. 1937년 하와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해 교포들의 소식을 전했다. 한반도 강점을 규탄하며 독립을 호소하는 로비와 미주 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한 강연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황 관장은 지난해 하와이 미주 항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다 한 사관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일본의 진주만 침공 미국에 사전 경고… 행동하는 신앙인 한길수
입력 2018-03-0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