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만지고 입 맞추고… ‘연기지도’로 포장된 성폭력

입력 2018-02-26 05:00
사진=뉴시스

문화예술계 도제식 교육 시스템 한계 노출

연출가·교수 입장에서
지도 방식으로 합리화
‘성추행’ 반박 쉽지 않아

“도제식 교육 시스템과
권력 독점형 구조 바꿔야”

성폭력을 고발하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보면 ‘연기지도’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피해자들의 증언에서도, 가해자들의 변명에서도 ‘연기지도’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윤택 조민기 오태석 윤호진 한명구 등 미투로 드러난 가해자들은 모두 ‘연기지도’를 빌미로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대학교수 또는 연출가라는 위치에 있었다. ‘연기지도’는 문화예술계에서 온갖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는 ‘만능열쇠’로 쓰여 왔던 것이다.

이윤택 연출가에게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발성연습 개인지도’라는 방식으로 당했다. 오랫동안 어린 여자 단원들에게 저질러 온 소위 ‘안마’라는 게 2012년 무렵 문제가 되자 이윤택은 연기지도를 끌어들였다. 이재령 음악극단 콩나물 대표 겸 연출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알린 다수의 피해 내용을 보면 이렇다.

“소극장 분장실에서 개인적으로 발성 연습 도중 ‘섹스 해봤어요? 해봤지요? 그거랑 똑같아요’ 하며 몸을 밀착해 가슴 주위를 눌렀다.” “발성연습의 일환으로 배우들에게 대사를 시킨 후 가슴을 접촉, 뒤로는 성기 접촉도 있었다.” “황토방에서 가슴을 다 드러내놓았다. 이 일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했지만 연기훈련으로 둔갑됐고 저는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지는 행위가 ‘성추행’이라는 것을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연출가이자 선생이었던 이윤택은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일을 서슴없이 해댔다. “발성연습을 해준다며 직접 성기에 막대나 나무젓가락을 꽂아 버티게 했다”는 충격적인 일도 자행했다. 이윤택을 정점으로 하는 그 사회에서는 개인지도로 합리화된 성범죄를 문제 삼는 이가 많지 않았다.

조민기의 해명에도 ‘연기지도’라는 말이 등장한다. 조민기는 성추행 고발이 시작된 시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슴으로 연기하라고 손으로 툭 친 것을 가슴을 만졌다고 진술한 학생이 있다”며 ‘연기 지도의 일환일 뿐 문제 삼을 일 아니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조민기의 해명은 도리어 수많은 ‘미투’와 ‘위드유’(피해자를 공감하고 지지한다는 의미)를 촉발시켰다. 조민기가 교수로 재직했던 청주대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줄지어 그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워크숍이나 오디션, 연기에 관한 일로 상의하자는 교수의 부름에 거절할 수 없었던 어린 학생들이 오피스텔에 불려가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성추행이 시작됐다.” “공연 연습을 지도할 때는 ‘흥분을 못하니 돼지발정제를 먹여야겠다’거나 ‘너는 가슴이 작아 이 배역을 하기에 무리가 있으니 뽕을 넣어라’는 언어 성폭력을 저질렀다.”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이 ‘연기지도’로 포장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 성향에 따른 일탈이라기보다 도제식 교육과 견고한 위계질서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게 크다. 캐스팅이나 평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수나 연출가들에게 권력이 몰리면서 위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질러도 문제 삼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왔다. 입맞춤을 하고 가슴을 만지고 허벅지를 쓰다듬는 등의 폭력을 연기지도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연기지도를 빌미로 삼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안겼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가’ 하고 자책하게 했다. 한 피해자는 “제가 너무 유난이고 예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성폭력을 피하려다 오히려 ‘근성도 없는 신인’으로 찍히거나 오히려 ‘몸을 막 굴리는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갖게 했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도제식 교육 시스템과 권력 독점형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문화예술계의 권력을 몇몇이 독점하는 구조가 바뀌는 데서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