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레이엄의 삶과 신앙] 대규모 여의도 집회 등 한국교회 부흥 촉매 역할

입력 2018-02-26 00:00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한 서울전도대회 마지막 날인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 전경. 110만명에 달하는 청중을 앞에 두고 연단 중앙에서 설교하는 그레이엄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오른쪽)의 뒷모습이 보인다. 당시 서울전도대회는 그레이엄 목사의 국내외 전도집회 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행사로 꼽힌다. 국민일보DB
빌리 그레이엄(1918∼2018) 목사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닌 수식어 ‘복음 전도자’의 사명에 충실했다. 냉전시대에도 그는 정치색을 배제한 채 소련과 동독 등 공산권 국가를 넘나들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1952년과 73년, 84년 등 세 차례 한국을 찾은 건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1973년 6월 3일 주일 오후 서울 여의도광장. 벽안(碧眼)의 목회자는 광장에 운집한 청중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서신 분들은 큰 소리로 따라 해 주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죄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50대 미국인 목사의 권면에 4만4000여명이 일어났다. 그들은 두 손을 모아 회개했다. 앞서 5월 16일부터 이어진 ‘빌리 그레이엄 목사 한국 전도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5월 30일 그레이엄 목사가 서울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전한 메시지 일부다. “오늘 밤 저는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이의 이야기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세상과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처음 들어 본 이들에게조차 그 울림이 컸다. 그는 당시 집회에 참여한 한국인들에게 명확한 지침을 전달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한 분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또 누구든 전도하세요.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세요.”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집회 준비위 측에선 많아야 50만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사람이 전쟁을 대비해 말과 병사를 준비해도 승리는 하나님께 달려있다’(잠21:31)고 했던가. 여의도광장 집회엔 닷새 동안 연인원 300만명 이상이 모였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는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는 한국교회의 전도운동 확산과 부흥에 촉매 역할을 했다”며 “이후 74년 ‘엑스플로 74대회’, 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84년 ‘한국선교100주년기념대회’등이 개최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 땅에 지핀 복음화의 불씨가 들불처럼 번지는 시기였다.

그레이엄 목사의 첫 방한은 6·25전쟁 때인 52년 12월이었다. 그는 그레디 윌슨, 밥 피어스, 국제십대선교회(YFC) 저널리스트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당시 750명의 주한 외국 선교사들과 수천 명의 군인과 군목, 한국인이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통역은 고 한경직 목사가 맡았다.

그레이엄 목사는 귀국 후 한국 상황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많은 피난민이 새벽부터 부산 바닷가 인근의 언덕에 천막을 치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 명의 목사와 전도사가 공산당에 죽임당하거나 끌려갔다. 하지만 신학교마다 많은 학생이 모여 순교자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사람들이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레이엄 목사는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만일 오늘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믿을 수 없다면 지금 한국에 가라”고 덧붙였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