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한영애·윤도현 등 출연
무명 뮤지션이었던 20대 이영훈, 이문세 만나면서부터 삶 달라져
정규 음반 8장 내며 공전의 히트… 서정적 멜로디… 가요계 지각변동
2008년 48세 일기로 세상 떠나 팝 발라드 개척한 인물로 평가
서울 정동길을 걷다보면 작곡가 이영훈(1960∼2008)을 기리는 노래비를 만날 수 있다. 고인이 세상을 뜬 지 1년이 되던 날인 2009년 2월 14일에 세워진 노래비다. 노래비 하단엔 고인의 얼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밑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영훈씨의 음악들과 영훈씨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당신의 노래비를 세웁니다. 영훈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한국인 가운데 노래비에 담긴 문구처럼 그의 음악을 ‘인생의 한 부분’처럼 느끼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가수 이문세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고인의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선사했고,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이영훈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여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뜨거워지는 분위기다.
추모 행사로는 오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10주기 헌정공연이 대표적이다. 고인의 단짝이었던 이문세를 비롯해 한영애 윤도현 박정현 김범수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무대에 오른다.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현대무용가 김설진 등도 출연할 예정이다. 고인의 아들인 이정환 영훈뮤직 본부장은 25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아버지의 음악을 변함없이 사랑해주고 계신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한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출신인 이영훈은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연극이나 무용에 쓰이는 음악을 작곡하던 무명의 뮤지션이었다. 그의 삶이 달라진 건 1985년 이문세를 만나면서부터다. 이문세는 2015년 3월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이영훈이라는 최고의 작곡가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며 고인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난 2집까지 낸 가수였다. 하지만 음반들의 판매량은 저조했었다. 1집은 7000장, 2집은 겨우 8000장이 팔렸으니까. 나는 새로운 작곡가를 찾아야 했다. 마침 연습실에 더벅머리를 한 청년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이영훈씨였다. 습작을 들려달라는 요청에 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소녀’의 전주였다. 가슴을 치는 음악이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문세의 정규 음반 8장(3·4·5·6·7·9·12·13집)이 이영훈의 작품이다. 이들 음반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는 한두 곡이 아니었다. ‘소녀’ ‘광화문연가’ ‘그녀의 웃음소리뿐’ ‘난 아직 모르잖아요’….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그의 음악은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8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이영훈은 200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6년 대장암 판정을 받으면서 생사의 기로에 섰다. 두 차례 수술대에 올랐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2008년 2월 14일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이영훈은 병상에 있을 때 이문세에게 “CCM 음반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지만 현실화되진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영훈을 “한국의 팝 발라드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서정민갑 음악평론가는 “이영훈은 이문세의 페르소나였고, 이문세 역시 이영훈의 페르소나였다”면서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내놓은 음악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리며 가요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인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가요사에서 ‘발라드의 문법’을 만들어낸 뮤지션이 이영훈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영훈이 남긴 노랫말 역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 유하는 ‘재즈’라는 시에는 고인의 작품 ‘옛사랑’을 언급하며 이렇게 적었다. ‘옛사랑이란 노래가 있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때론 그렇게, 시보다 시적인 노래가 있지….’
음반사 JNH뮤직을 이끌고 있는 이주엽 대표는 “이영훈은 좋은 멜로디와 좋은 노랫말을 동시에 써낼 수 있는 흔치않은 재능을 지닌 음악가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많은 노래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이영훈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며 “그가 남긴 노래들은 아주 먼 미래에도 애창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클래식’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이문세를 만든 작곡가, 유통기한 없는 음악… 이영훈 10주기
입력 2018-02-26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