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 위대한 99년 생애

입력 2018-02-23 00:01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943년 담임한 일리노이 웨스턴 스프링즈 제일침례교회 전경. BGEA 제공
국제십대선교회(YFC)를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던 시절의 그레이엄 목사(왼쪽). 1954년 런던 전도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그레이엄 목사가 같은 해 11월호 타임지 표지 인물로 실렸다. BGEA 제공
2005년 6월 그레이엄 목사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전도집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BGEA 제공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반드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책임을 다했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활용했는지에 대해 말입니다.”(1966년 독일 베를린 ‘세계전도대회’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길 잃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평생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21일(현지시간) 99세를 일기로 천국으로 돌아갔다.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자의 삶

그는 1918년 11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회심한 그는 40년 플로리다 성경대학을 졸업하고 남침례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49년 로스앤젤레스 부흥집회를 통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부흥목사가 된 그는 50년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를 창설하면서 세계적인 부흥사로 떠올랐다. 54년 런던 헤린게이에서 열린 집회는 12주간 200만명이 모였으며, 57년 뉴욕집회 때는 연인원 235만명을 동원했다.

그는 185개국을 누비며 2억명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했다. TV와 라디오를 포함하면 22억명이 넘는다. 그는 공산권 복음화에도 매진했다. 67년 유고슬라비아를 시작으로 77년 헝가리, 78년 폴란드, 82년 소련과 동독 체코, 84년 소련, 85년 루마니아 헝가리, 88년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

강력한 복음의 능력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는 명쾌하고 직설적이었다.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의 진수를 제시한 것이다. 죄, 십자가, 천국과 지옥, 부활과 예수의 재림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특히 시대와 동떨어진 메시지가 아닌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담은 다양한 자료를 제시했다. 그의 메시지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비껴가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기독교가 낡은 종교가 아닌 매력적인 종교로 부상하는 데 일조했다.

“아버지는 예를 들어 집회를 준비하실 때 청중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고 전문가들과 의논하셨다. 그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 복음에 방해가 되는 문화요인들, 복음전파에 용이한 문화요인들 등.”(‘나의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유산’ 중)

실제로 그레이엄 목사는 부흥설교를 할 때 그 도시의 죄악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했다. 인간사회의 실존적 위기에 대해 조사하고 분석한 뒤 늘 이런 위기의 심층적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 죄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말씀선포에 막중한 책임감 느껴

그의 자서전엔 이런 고뇌가 담겨 있다. “영원한 결과를 초래할 중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무슨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늘 두려웠다. 게다가 설교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싸움이다.”(자서전 ‘내 모습 이대로’ 중)

그는 폐렴, 신장결석, 전립선암, 혈전성 정맥염, 뇌수종 등 늘 육체적 고통 속에 있었다. 특히 뇌수종은 파키슨병과 닮아 몸이 떨리고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전 세계에서 집회를 인도한 후 귀국하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메이요병원이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고된 일은 복음전도 설교라는 말을 의료 선교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복음전도 설교는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이다. 청중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자서전 ‘내 모습 이대로’ 중)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원동력을 얻었다. 57년 16주간 이어진 뉴욕 집회 때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이제 말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설교 자료는 동이 났고 체력은 소진됐으며 내 정신력도 바닥이 났다. 몇 분 후에 일어나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어섰고 갑자기 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설교였다.”(‘빌리 그레이엄, 하나님의 대사’ 중)

성령께 의지한 겸손한 하나님의 종

그는 겸손했다. 1973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주변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자리에 마침 있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도, 거대한 사역조직을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해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했다.

“나는 내가 절대적으로 무력하며 성령님만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실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항상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명심하는데 나는 씨를 뿌리는 자일 뿐이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씨가 열매 맺도록 하실 수 있다.”(자서전 ‘내 모습 이대로’ 중) 그는 70년 미국 고든 콘웰신학교를 세웠으며, 크리스채너티투데이를 창간했다. 70여년간 복음전도자로 외길을 걷다가 2005년 설교자의 자리에서 공식 은퇴했다.

한국 근대 복음주의 운동을 견인

한국과 그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1952년 12월 6·25전쟁 당시 부흥집회를 인도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전쟁의 아픔을 나눴다.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전도집회에는 5일간 110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그는 한국인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목마름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한국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교회사)는 “1973년 여의도 전도집회를 시작으로 74년 엑스플로 74대회, 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84년 한국선교100주년기념대회로 이어지는 대중전도운동과 복음주의의 발흥은 한국교회에 놀라운 성장과 해외 선교열을 확산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