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어주고 끌어주고… 이번엔 함께 달렸다

입력 2018-02-21 23:41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의 김보름 박지우 노선영(왼쪽부터)이 21일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팀추월 7∼8위 순위 결정전에서 레이스를 마친 뒤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강릉=윤성호 기자

예선전과 달리 노선영 2번 주자
다같이 결승선 통과… 관중 박수
폴란드에 패해 최종 8위

권력·파벌·약자·불공정…
한국사회 병폐 고스란히 농축
국민청원 이틀 만에 50만 넘어

한국 여자 팀추월 대표팀의 노선영(29) 김보름(25) 박지우(20)가 21일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팀추월 7∼8위 경기가 열리기에 앞서 경기장인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장에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다. 노선영과 박지우가 먼저 들어오고 김보름이 뒤따르는 모양새였다. 이들 셋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지난 19일 예선전에서 발생한 왕따 논란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예선전에서 맏언니 노선영은 동료 김보름과 박지우에 한참 뒤처진 채 혼자 레이스를 펼쳤다. 팀 동료를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했고 분노했다.

게다가 김보름은 경기 후 노선영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19일 ‘김보름 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과 빙상연맹의 적폐를 청산하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게시된 이후 불과 이틀 만에 참여자가 50만명을 넘어섰다. 백철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과 김보름은 20일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었지만 노선영이 곧바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사태가 가라앉기는커녕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7∼8위 결정전 시작에 앞서 차례로 세 선수의 이름이 호명됐다. 관객들은 김보름과 박지우의 이름이 불릴 때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노선영의 이름이 불린 뒤에야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앞서 팀추월 결승에 오른 남자 대표팀(이승훈 정재원 김민석)의 등장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예선 마지막 주자였던 노선영이 2번 주자로 나섰다. 박지우가 마지막 3번 주자 역할을 맡았다. 경기 중 김보름이 노선영을, 노선영은 박지우의 허리를 밀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세 선수는 거의 동시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기력은 아니었다. 3분07초30의 기록을 써냈다. 상대팀 폴란드(3분03초11)보다 4초19나 늦었고, 예선전 기록(3분03초76)에도 못 미쳤다. 불거진 논란을 의식한 듯 셋이서 함께 경기를 치르는 것에만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이들 셋이 레이스 도중 앞 선수를 밀어주는 모습을 보여준 데다 함께 결승선에 들어오면서 관중의 큰 박수를 받은 것에 위안을 삼아야 했다.

경기 후 세 선수로부터 이번 논란과 관련해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노선영과 김보름은 취재진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묵묵부답으로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박지우도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조용히 떠났다.

7∼8위전에서 모처럼 팀워크를 보여줬지만 이번 왕따 파문은 쉽게 가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에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파벌, 불공정 관행, 왕따, 약자에 대한 배려 부재, 부당한 권력 사용 등이 고스란히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일 “최근 확산되는 ‘미투 운동’의 초점은 성추행, 성폭행에 맞춰져 있지만 본질은 ‘권력의 부당한 사용’이다. 특정 선수가 (감독이나 빙상연맹 등의 권력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자 국민들이 분개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는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예민한 상태”라며 “김보름이 룰을 지키지 않고 반성하는 태도도 보이지 않자 국민들이 분노했다”고 분석했다.

강릉=박구인 황윤태 기자 captain@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