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번 주자’의 힘
주로 속도 떨어지는 선수 몫
스피드 좋은 선수로 내세워
상대팀 취약주자 상대케 해
(2) ‘배턴 터치’ 묘수
남들과 똑같은 타이밍 아닌
반바퀴 더 달린 후 주자 교체
허 찌르며 선두 빼앗는 작전
(3) 꾸준한 연습·연구
외국 선수들 한국 선수들의
반복적 연습량에 혀 내둘러
왕좌 지키려 연구도 끊임없이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은 계주에 애착이 크다. 동료끼리 메달을 가려야 하는 개인 종목과 달리 모두가 같은 색깔의 메달을 받기 때문이다.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20일 평창 동계올림픽 3000m 계주 결승전 직전에 모여 “다른 종목보다도 이 종목만큼은 어떻게든 중국을 이기자. 한 번 해 보자”고 결의를 다졌다.
이번 우승으로 한국은 역대 8개의 여자 쇼트트랙 계주 금메달 가운데 6개를 독식했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쉽게 따낸 건 단 한 개도 없다. 허를 찌르는 작전, 다른 나라는 엄두를 못 내는 연습량이 영광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작전의 승리
이날 한국은 5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승부를 걸었다. 3번 주자 김아랑이 중국과 캐나다에 이어 3위로 달리고 있었다. 출발 지점 근처에서 중국과 캐나다가 주자를 교체할 때 김아랑은 갑자기 아웃코스로 크게 달려나갔다. 1바퀴 반을 탄 다른 선수들이 다음 주자의 몸을 밀어주며 속도를 줄인 틈을 파고든 것이다. 김아랑이 그렇게 1바퀴를 더 달린 이후 선두 싸움은 한국과 중국으로 압축됐다.
상대와 엇갈린 타이밍에 주자를 교체하며 선두를 빼앗는 작전은 한국의 전매특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의 여자 계주 결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당시 1번 주자였던 주민진은 다른 나라 선수들이 서로 밀어주는 사이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며 속도를 끌어올렸다.
4번 주자 자리에 스피드가 좋은 선수를 배치하는 것도 한국이 2006년 토리노올림픽부터 선보여온 작전이다. 상대팀의 취약 주자를 앞지르는 전략이다. 한동안 쇼트트랙 계주의 4번 주자는 팀에서 속도가 떨어지는 선수가 맡았다. 이를 역이용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에서도 순간적인 스피드를 뽐낸 김아랑과 마지막 2바퀴에서 선두를 탈환한 최민정이 돋보였지만, 숨은 활약은 4번 주자 김예진이 펼쳤다. 김예진은 레이스에 참가하자마자 이탈리아를 제치며 기세를 올렸다. 김예진은 경기 막판 4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닥친 위기에서도 침착했다. 자신을 힘껏 밀어줘야 할 김아랑이 제대로 밀어주지 못한 채 넘어졌지만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준비성이야말로 최고의 작전”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아랑은 경기 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5바퀴를 남기고 승기를 잡아온 질주에 대한 질문을 받자 “즉흥적이었다”고 답했다. 사전에 짠 전략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대로 그저 달려나갔다는 얘기다. 그는 “계주 연습 때는 어느 자리에 있든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훈련해 왔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계주 예선에서는 한 선수가 넘어지는 변수 속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을 쓴 여자 대표팀이었다.
연습과 연구
아무리 좋은 계주 작전도 선수들의 연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일가를 이룬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은 ‘노력형’을 자처한다. 토리노올림픽 3관왕인 진선유 단국대 쇼트트랙 코치는 세간의 ‘천재형’ 평가에 대해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미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토머스 홍(한국명 홍인석)은 최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선수들은 여섯 살 전후부터 훈련을 받는데, 종일 빙판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엘리스 크리스티(영국)와 샤니 데이비스(미국) 등 비시즌에 한국을 찾은 선수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한국 학생 선수들의 연습량이었다. 크리스티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선수들이 울면서 수천 번씩 스쿼트(허벅지가 무릎과 수평이 될 때까지 앉았다 섰다 하는 동작)를 했다”며 “한국이 왜 그렇게 쇼트트랙에 강한지 알게 됐다”고 했다. 데이비스는 미국 선수단 블로그에 “믿지 못하겠지만 난 한국 중·고등학생들과 훈련했다”며 “35세인 나는 내 절반 나이의 선수들에게 떠밀려 다닌다”고 썼다.
왕좌 자리를 도전받는 처지인 한국 쇼트트랙은 경기력 향상 연구도 계속했다. 최적의 출발 자세, 직선과 곡선 주로에서의 양발 변위, 무릎 각도를 꾸준히 찾았다. 선수마다 스케이트 칼날의 곡률(曲率)을 다르게 적용한 것도 한국이 먼저였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에 가서 쇼트트랙 경기를 한다는 것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축구 시합을 하거나, 미국 보스턴에서 야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이경원 기자, 강릉=허경구 기자 neosarim@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
韓 막강 ‘쇼트 계주’ 뒤엔… ‘삼박자’ 있었다
입력 2018-02-21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