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영향력 막강… “찍히면 이 바닥을 떠야 한다”

입력 2018-02-21 05:05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무엇이 문제인가

잘 나가는 감독·연출자들
캐스팅 권한부터 공연 전반
좌우하는 권력 쥐고 있어
당하고도 참는 경우 많아
주변 사람도 대부분 침묵
폐쇄적 구조가 ‘괴물’ 키워

전문가들 “정부·기관이 적극 나서야 문제 해결”


‘거장’으로 불리던 이윤택 연극 연출가의 성폭력 추문이 연일 확산되고 있다. 다른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한국판 ‘미투(#MeToo)’의 폭로 대상으로 지목되는 모습이다. 권위자가 절대 권력을 쥐고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구조에 피해자의 편에 들었다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침묵의 동조가 더해져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기회에 문화·예술계 전반의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배우이자 극단 나비꿈 대표 이승비씨는 20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연출가가 안마를 명목으로 ‘기를 받아야 공연을 할 수 있다’며 성기 쪽을 만지게 했고 사정을 한 경우 이튿날 그 친구는 더 큰 배역을 맡게 됐다”고 주장했다. 성추행이 배우의 생명인 배역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또 “(문제 제기를 한 뒤) 내가 메인으로 7회 공연을 하기로 했던 게 5회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도 했다.

원로 연출가 오태석씨도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한 연출가는 지난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과거 극단을 운영하던 서울예대 교수님이 허벅지를 만졌다. 팔뚝 안의 연한 살을 만지고 꼬집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글에는 교수의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극단을 운영하는 교수라는 점에서 오태석 연출가가 지목됐다. 그는 의혹에 대한 입장을 정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폭로가 이어지는 건 그만큼 묵인된 성폭력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이 연출가가 19일 열었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행동을 “18년 가까이 일어났던 관행”이라고 표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연극계의 한 관계자는 “이쪽 업계에서는 사소한 성추행이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범죄 수준의 성폭력이 드러날 수 없었던 배경에는 예술계에서 거장이 갖는 특수성이 있다. 연극의 경우 연출가가 배우의 캐스팅 권한부터 공연 전반을 좌우할 권력을 모두 쥘 수 있다. 서울예대 재학생은 지난 18일 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에 “16살 때 극단 연출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며 “거절하는 순간 저는 그 소중한 연극판에서 제외되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업계를 떠야하는 압박감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익명의 제보자도 앞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연출가의) 안마를 거부하면 이른바 캐스팅룰이 이뤄진다”며 “전체 단원들이 다 모여서 거부한 여성 단원에 대한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그 전에 캐스팅됐던 역할을 배제시키는 작업이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위자의 제자로서 처음 업계의 문턱을 밟는 것이 일반화된 대부분의 예술 분야가 비슷한 애로사항을 안고 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 A씨는 “공연이나 음악 등 예술계에서는 소위 라인이라고 부르는 스승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며 “심복처럼 이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따라야만 한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저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폐쇄적 구조가 더해져 괴물을 키웠다. ‘찍히면 이 바닥을 떠야 한다’는 생각이 주변인까지 침묵케 한 것이다. 이 연출가가 몸담았던 연희단거리패도 문제를 알면서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지 않았다. 뮤지컬계의 한 연주자는 “배우들의 경우 잘나가는 감독에게 찍히면 공연을 못하게 된다는 생각이 매우 크다”며 “그 사람하고만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입김 때문에 이 바닥에서 떠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얘기했다가는 당장 보복 당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 쉽게 얘기할 수 없다”며 “저항을 해도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 선배들도 침묵이 최선이라고 권유해 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관계 부처의 근본적인 개혁안이 나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피해자의 폭로와 주변인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기관이 나서지 않는다면 제도 개선이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위드유(WithYou)’, ‘미퍼스트(MeFirst)’ 운동에도 의미가 있지만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 차원의 문제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평론가도 “용기 있는 몇 분들로 인해 이슈화가 됐지만 아직도 드러내지 못하는 분들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며 “소수가 지배하고 있는 구조에서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주언 권준협 기자 eo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