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수상 영예→ 나락… 나지프 무직 스토리
차별 겪는 자신 소재 영화서 주연
영광도 잠시… 다시 고철 모아 생계
“아이들 사흘 간 거의 못 먹었다”
은곰 트로피 530만원에 팔아
독일 난민 신청 거절당하자 좌절
집시는 인도에 뿌리 둔 유랑민족
수세기 동안 온갖 박해 시달려
교육·직업 등서 멸시와 차별 극심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20일(현지시간) 이 영화제에서 5년 전 남우주연상(은곰상)을 수상했던 배우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AFP통신은 다니스 타노비치가 감독한 영화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An Episode in the Life of an Iron Picker)’에서 주역을 맡았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집시 출신 배우 나지프 무직이 18일 48세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무직의 형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수개월 사이에 동생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18일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다”면서 “동생이 재정 문제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월 독일로 가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2013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영화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는 보스니아에서 차별에 시달리는 집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무직이 출연한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로 타노비치 감독이 신문에서 발칸전쟁 당시 5년을 군에서 복무하고도 연금이나 의료보험 등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그의 가족 이야기를 읽고 영화화했다. 변변한 직업 없이 고철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던 무직이 아내의 유산 이후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애쓰다 좌절한 실화를 그린 영화에는 무직과 그의 가족, 친지들까지 직접 출연했다.
무직은 상을 받은 뒤 보스니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또 유산 이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던 아내가 다시 임신해 아들을 낳는 등 행복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프로 배우가 아니었던 그는 다시 고철을 수집하는 옛 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후 생활고에 쪼들리던 그는 지난 1월 보물로 여기던 은곰 트로피를 4000유로(약 530만원)에 팔았다. 그는 당시 “트로피를 파는 것은 매우 힘든 결정이었지만 아이들이 3일간 거의 먹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직은 2014년 독일 망명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또 지난달에는 은곰 트로피를 판 돈 일부를 가지고 베를린영화제에 가서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제 시작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과거 망명을 신청했던 것과 관련해 벌금 부과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보스니아에는 7만5000명의 집시들이 살고 있다. 보스니아의 한 비정부기구(NGO)에 따르면 집시 중 정규직 취업자는 5%에 불과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집시들을 보스니아에서 ‘가장 취약한 그룹’으로 평가했다. 교육, 직업, 정치 등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차별받고 있기 때문에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보스니아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집시에 대한 차별은 뿌리 깊다. 인도 북부에 뿌리를 둔 집시는 15세기 이후 발칸반도를 따라 유럽과 러시아에까지 퍼져 있는데, 수세기 동안 분리정책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선거·피선거권도 박탈당했다. 특히 나치 시절에는 유럽 각지에서 50만∼70만명의 집시가 학살당하기도 했다.
현재 유럽에는 600만∼1000만명의 집시가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유럽 국가들의 악화된 경제 상황, 시리아와 아프리카 난민의 유입,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공포가 확산되면서 집시에 대한 반감도 한층 커지고 있다. 특히 더 나은 삶을 찾아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집시를 공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2016년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서유럽에서 집시에 대한 인식은 무슬림이나 유대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깊이 읽기] 은곰상 수상자마저 생활고로 사망… ‘집시의 비극’
입력 2018-02-21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