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이용한 성관계는 성폭행”… 이윤택에 비난 여론 봇물

입력 2018-02-20 05:03
이윤택 연극 연출가가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제기된 성추행 논란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왼쪽 사진). 배우 홍예원씨가 이 자리에서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는 피켓을 들고 이 연출가에게 항의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이윤택 “성관계 했지만 성폭행 아니다” 주장

“李가 성폭행… 혼자 낙태
사실 알고 200만원 건네
잊혀져갈 때쯤 또 성폭행”
李 만행 폭로 쏟아져

연희단거리패, 해체 선언
밀양시, 연극촌 계약 해지

인간문화재 하용부씨
성폭행 가해 글도 올라와


연극 연출가 이윤택(66)씨가 배우들에게 상습적인 성폭력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극계의 민낯도 함께 들춰지고 있다. 이 연출가뿐 아니라 다른 유명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사건은 연극계 구태 문화 전반을 겨냥하는 수준으로 확장됐다. 그가 평소 강조했던 가족 같은 연극 커뮤니티는 어떤 부정과 모순이 있어도 쉽사리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제식·폐쇄적 구조를 지닌 왕국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셈이다. 도제식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다른 문화계에도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한 성폭력은 상존한 위험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이 연출가는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사과했다. 그는 “피해 입은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며 “제 죄에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이 연출가는 “성관계는 했지만 폭력적이고 물리적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고 말해 진정성 없는 면피성 사과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관행적으로 일어나는 아주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때는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수 있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저질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추가 폭로도 이어졌다. 연극배우 김지현씨는 페이스북에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을 할 때 혼자 안마를 하다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2005년 임신을 했고 당시 조용히 낙태를 했다”며 “낙태 사실을 아신 선생님이 제게 200만원 정도를 건네시며 미안하단 말을 하셨다”고 토로했다. 그 사건이 점점 잊혀져갈 때쯤 이 연출가가 또 다시 성폭행했다고도 덧붙였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던 배우 진서연씨는 SNS에 “이윤택. 길에서 만나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차오른다”고 적었다. 배우 이승비씨도 “오래전 이 연출가가 연습 도중 온몸을 만져 충격에 휩싸여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폭로했다.

연희단거리패는 그동안 이런 일을 알면서도 침묵해왔다고 시인했다. 내부적으로 단원들이 이 연출가에게 항의했고 공개 사과하는 자리도 마련했지만 이 과정이 반복됐고 법적 조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진실을 대면한 이상 나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해 연희단거리패를 오늘부로 해체한다”며 “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이 연출가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보리(가명)씨는 인간문화재 하용부(63) 밀양연극촌장 역시 성폭행 가해자라는 글을 올렸다. 김씨는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연극계의 성폭력 문제는 비단 이 연출가와 하 촌장의 문제가 아니다”며 “공개 되지 않은 가해자가 많다”고 주장했다. 하 촌장은 해당 논란으로 19일 강원도 강릉페스티벌파크에서 열린 2018 평창문화올림픽의 아트온스테이지 공연에 불참했다. 20년째 운영된 경남 밀양연극촌도 문을 닫는다. 밀양시는 밀양연극촌에 무료 임대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연극 단체들은 줄지어 이 연출가를 퇴출시켰다. 서울연극협회는 “이 회원의 성폭력 사실을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정의하고 협회 정관에 의거해 최고 징계 조치인 제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연희단거리패도 책임을 물어 ‘2018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를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연극협회와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아시테지(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 한국극작가협회 등도 잇따라 이 연출가를 제명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맨 처음 이 연출가의 성추행을 페이스북에 고발했던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는 회견 내용을 듣고 “성관계였다고 말하는 그 입에 똥물을 부어주고 싶다. 하지만 기자회견장에서 자수를 한 셈”이라며 “우리는 다음 수순을 밟는다. 감옥 갈 준비하라”고 격분했다.

피해 배우가 속한 극단 907의 설유진 대표는 “성폭력의 정의를 물리적인 것에 한정한 발언이라면 교육이 필요하다”며 “성폭행이 아닌 합의 하의 성관계라는 주장은 본인의 권력과 영향력을 충분히 활용해 온 수십 년의 세월을 반증한다”고 꼬집었다.

회견장에서 피켓을 든 채 사과를 요구했던 배우 홍예원씨는 “피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공개 사과라는 방식 자체가 2차 가해”라며 “내용은 ‘술은 먹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상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도 “진심으로 뉘우친 것 같지 않다”며 “폭로한 후배들에게 위로와 경의를 표한다. 블랙리스트 이상으로 예술계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이건 사과가 아니다”라며 “성폭행 고발을 부인하기 위한 기자회견”이라고 비판했다.

권준협 기자 gaon@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