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고민 끝에 평창에 다녀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위안부 합의 이행과 평화의 소녀상 철거, 올림픽으로 연기된 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 등을 촉구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는 긴밀한 미·일 관계를 과시했다. 두 사람은 올림픽 개회식 사전 리셉션에 함께 지각하고는 개회식에서도 뒷자리의 북한 김영남과 김여정에게 보란 듯이 다정하고 긴밀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미 이 둘은 개회식 전날 도쿄에서 대북 압박을 최대한 강화하기로 재확인한 터였다. 한편 리셉션 석상에선 김영남에게 납치문제 해결과 일본인 납치 피해자 전원 송환을 요구하고 핵·미사일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이번의 평창 동계올림픽이 평화정착을 위한 천금 같은 기회가 되길 기원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베 총리의 집요한 대북 압박 기조는 남의 잔칫집에 재 뿌리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 해빙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불쾌하게만 받아들이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아베 총리의 방한이 주는 몇 가지 함의를 읽어내야 한다.
첫째, 일본은 실질적인 ‘주변 4강’이 돼가고 있다. 그간 우리 언론이나 학계에선 관행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와 함께 일본을 4강이라 칭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력을 뒷받침으로 하는 동북아 권력정치, 강대국 간 지정학 게임의 본격적인 행위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4강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북한 핵·미사일 문제, 중국의 부상 및 중·일 간 영유권 문제 등을 배경으로 점차 정치적 발언권을 확대해 왔고 이젠 직접 한·미 훈련을 주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참고로 아베 총리는 지난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패럴림픽 종료 후에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둘째, 아베 정권의 권력정치 행보를 뒷받침하는 것은 강력한 미·일동맹이다. 전임 버락 오바마 정부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지난 1년간 아베 총리는 이를 위해 트럼프 정부에 온갖 정성을 쏟아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대미 전략의 핵심은 위협인식 공유다. 트럼프 정부는 신국가안보전략 보고서(2017년 12월 18일)를 통해 중·러를 압제국가, 북한을 불량국가로 규정했다. 아베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일본에 해양권익을 확대하는 중국, 주변국 영토를 침범하는 러시아, 핵·미사일 개발을 거듭하는 북한은 모두 위협국가다.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그 뒤를 따라가는 동맹 관계는 더 이상 아닌 듯하다. 앞으로 구체적인 분석이 따라야겠지만 미국의 위협인식이 일본의 그것에 가까워진 데는 일본의 어젠다 설정 능력, 다시 말하면 지속적으로 미국 측을 설득하고 강조한 결과로 보인다.
셋째, 이상은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완화나 남북대화, 나아가 향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 예기치 않게 일본이 강력한 ‘비토파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일본 측은 방법은 대화가 아닌 한·미·일 공조를 통한 압박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에 북한은 상종할 수 없는 나라다. 테러국가이고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왕조국가이며 핵 공갈을 하고 한국 내 남남갈등을 조장함은 물론 한·미·일 사이를 이간질한다. 만약 이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비핵화를 위한 북·미 간 대화 기운이 무르익을 경우 아베 정권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오면 트럼프 정부의 행동은 적지 않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설령 북·미 간 대화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일본은 미국 측에 일본인 납치문제를 대화 의제에 넣어줄 것을 요구할 개연성이 크다.
문재인정부가 운전석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들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 부처에서는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을 달래고 중국과 조율하기 위해 지금이 과연 명절인지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란 변수에 대해서도 끈기 있게 협의하면서 설득하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서승원(고려대 교수·글로벌일본연구원장)
[한반도포커스-서승원] 강력한 비토파워 일본
입력 2018-02-18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