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 여의치 않자
남북관계 개선으로 방향 선회
北, 대북 제재 전선 흩뜨리고
핵 보유국 지위 인정 노릴 수도
2000년대 있었던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또는 북핵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 핵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은 후에 성사됐다. 북핵 문제 진전이 남북 정상회담을 추동하는 순풍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비핵화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틀은 한층 견고해졌다. 북한은 북·미 대화가 여의치 않자 남북 관계 개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를 선언한 이후 북한은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특사 파견, 3차 남북 정상회담 제안으로 이어지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1차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집권 3년차에 열렸다. DJ는 2000년 1월 북한에 상호 협력과 평화 공존 등을 논의할 정상회담을 공개 제안했다. 이후 3월 유럽 순방 중 대북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이런 움직임은 빌 클린턴 미 행정부의 포괄적 대북 정책인 ‘페리 프로세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윌리엄 페리 미 대북조정관이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하고,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북·미는 수교 직전까지 갔었다. 이때는 북·미 제네바 합의도 파기되기 전이다.
2007년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 역시 그해 2월 6자회담 참가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초기 조치를 담은 ‘2·13 합의’를 도출하면서 발판이 마련됐다. 2·13 합의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포기를 전제로 핵 불능화 조치를 취하면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경제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합의 직후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재개되고, 북·미 간에도 관계 개선 흐름이 본격화됐다.
앞선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에서의 진전과 한·미 공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김여정으로부터 북한 방문 제안을 받고 ‘성사’에 앞서 ‘여건’을 언급한 것도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정부는 여건 조성을 위해 일단 남북 대화를 북·미 대화로 연결시키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2박3일 방한 기간 대북 압박만 하고 돌아간 점이 백악관의 강경 기류를 그대로 보여준다.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 평화 공세는 전 세계에 정상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북한이 당장 원하는 건 대북 제재 전선에 구멍을 내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핵 보유국 지위 인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까지도 ‘핵은 협상 대상이 아니며 북·미 간에 풀 문제’라는 통미봉남(通美封南) 태도로 일관해왔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이 비핵화 진전 없이 빈손 회담으로 끝날 경우 북한에 이용당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11일 “결국은 북한이 언제 비핵화 대화에 드라이브를 걸 것인가의 문제”라며 “남북 정상회담 이전에 대북 특사를 보내 이 부분에 대해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북한이 비핵화 대화에 있어 조금이라도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정부는 원칙에 충실한 대북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北, 대화카드 내밀었는데… 체제 선전용·정상국가 과시용?
입력 2018-02-12 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