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예고 시인 강사 성추행 고발 위해
학생들이 2년 전 결성했던 ‘탈선’
‘우롱센텐스’로 이름 바꾸고 활동 넓혀
여성 문인들 성폭력 사례 담은
‘참고문헌 없음’ 문집도 지난해 나와
지속적인 문제 제기·연대 분위기
가부장적 문단 풍토에 균열 생겨
#1.등단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여성 시인이 문학 행사 후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대거 모인 뒤풀이 자리에 갔다. 술을 마시던 중견 남성 소설가 A씨가 이 시인의 볼에 입술을 댔다. “철썩!” 시인은 A씨의 뺨을 후려친 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문단은 그런 시인을 ‘성깔 있는 여자’라고 헐뜯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후 주류 문단에서 밀려났지만 A씨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과거 문단의 성추행이나 성희롱은 이렇게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문제를 제기하는 문인이 오히려 ‘까칠한’ 사람으로 따돌림 당했다. 문단구조 상 갓 등단한 문인이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한 중견 여성 문인은 8일 “등단부터 문예지 청탁, 각종 문학상 심사 등에 이르기까지 유력 남성 문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의 부적절한 스킨십이나 희롱을 젊은 여성 문인이 거절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유력 문인의 원고를 담당하는 문학 출판사 여성 편집자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이들은 원고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인이나 소설가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약자의 지위에 놓인다.
가부장적 남성 문인들의 삐뚤어진 성의식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한 중견 문학평론가는 “여러 여성을 자유롭게 사귀면서 관계에 책임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을 예술가들의 특권으로 여기는 남성 문인이 여전히 있다”며 “아내가 있으면서도 젊은 여성을 애인이라 부르며 문단 모임에 끌고 다니는 걸 많이 봤다”고 말했다.
#2.한 계간지 유력 남성 편집위원 B씨가 젊은 여성 문인에게 추근거렸다. 상대가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B씨는 수시로 늦은 밤에 문자를 보내 ‘보고 싶다’며 만남을 종용했다. 이 사연을 들은 다른 여성 문인은 이 일에 대해 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그가 속한 문예지에 원고 청탁을 거절한다고 통보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2000년대 이후 사회 전반에 젠더(gender·사회적 성)의식이 높아지고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여성 문인들이 문단에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가부장적 문단 풍토에 본격적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남성 문인들의 행태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연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판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의 영향이 크다. 경기도 고양예고 학생 100여명은 2016년 말 강사였던 한 시인의 성폭행과 성추행을 고발하기 위해 ‘탈선’을 결성했다. ‘탈선’은 가해자가 “문학을 하려면 탈선을 해야 한다”며 문학 지망생들을 유린한 데서 유래한다. 이 사건이 알려진 후 SNS를 중심으로 ‘문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이 이어졌다. ‘탈선’은 최근 활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 ‘우롱센텐스’라고 이름을 바꿨다.
김현 시인도 이 무렵 문예지에 문단의 성추행 실태를 고발하는 글을 기고했다. 권여선 문정희 박솔뫼 김소연 황인숙 등 여성 문인 140여명은 지난해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를 진행해 같은 이름의 문집을 냈다. 여성 문인들의 성추행과 성폭력 고발 사례를 담은 문집이었다. 문집 수익은 관련 성폭력 피해자 소송 비용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문인은 실형을 선고받았고 일부는 한국작가회의 등 작가단체에서 제명을 당했다. 이런 일들이 축적되면서 문단의 성추행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됐다. 성추행 논란이 있었던 신임 한국시인협회장 감태준 시인에 대해서는 사퇴 여론이 강하다. 최영미 시인의 성추행 고발 시 ‘괴물’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높다. ‘참고문헌 없음’에 참여했던 30대 시인은 “요즘에는 남성 문인들이 외모 평도 조심스러워할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다”며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조금씩 바뀌곤 있지만 그래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힘 실리는 ‘문단 미투’… 갈 길 멀지만 오늘도 한 걸음
입력 2018-02-09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