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딸기밭과 식당 피해자
서로 의지하며 웃음 되찾은 김씨와 정씨
논산 딸기농장·서울 중국집에서
돈 한 푼 못 받고 밤낮없이 노역
가족에 기초수급비 갈취당한 것도 공통점
노예 탈출 뒤 함께 심리치료 받으며 교감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새 직장 얻고
같이 극장·찜질방 나들이… 일상의 자유 누려
더 나은 일자리 꿈꾸며 직업교육 받기도
“왜 이렇게 늦었어.”
“길이 막혀서….”
둘은 만나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난을 쳤다. 서로 집이 5분 거리여서 평소에도 자주 만나고, 매일 통화하며 안부를 묻는 사이라고 했다. 주말이면 함께 고기를 굽거나 영화관 사우나 책방을 함께 가며 친형제처럼 시간을 보낸다. 최근엔 영화 ‘신과 함께’를 같이 봤다며 자랑했다. “쉬는 날 동네를 돌아다니고, 바람을 쐬고, 같이 노는 게 너무 재밌다”고 말한 이들은 현대판 노예 사건 피해자들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문래동 한 카페에서 ‘논산 딸기밭 노예’ 피해자 김철민(가명·43)씨와 ‘식당 노예’ 피해자 정상호(가명·46)씨를 만났다.
김씨와 정씨는 회사 일을 끝내고 서둘러 인터뷰 장소에 왔다. 김씨는 지난해 5월부터 서울 종로구의 한 회사 구내식당에서 음식 재료를 검수하는 일을 시작했다. 음식 만들기에 앞서 빠진 재료를 채우고, 상한 것은 빼내는 게 주 업무다. 정씨는 서울의 한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서 정수기 부품 조립하는 일을 한다. 정수기 부품이 들어오면 나사를 교체하거나 볼트·너트 등을 조인다고 했다.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는 질문에 똑 떨어지게 답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다 만족하는 듯 보였다. “꽤 괜찮다”고도 했다. 김씨는 “예전 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며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돈이 제때 나온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정씨도 “현재 일터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고 좋다”며 “최근에는 새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의도에서 장애인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고 있다”고 의욕을 보였다.
조심스레 그들이 겪었던 노예 생활을 물었다. 두 사람 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과거의 상흔은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깨요. 새벽 5시부터 저녁 밤늦게까지 계속 일했어요. 일이 끝나면 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매일 일하는데도 쉬는 날은 없었어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려요.”(김씨)
“악몽 같은 일이죠. 주방 그릇 닦고 청소하고 하루 종일 일만 했어요. 24시간 운영되는 음식점이었는데, 자다가도 깨워서 일을 시켰어요. 지금은 심리치료 받고 있는데 그걸 받을 때는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정씨)
김씨는 2013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충남 논산의 한 딸기농장에서 일했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먹고 자며 딸기 재배와 포장, 딸기밭을 지키는 경비까지 모든 농장 일을 도맡아 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쉴 날이 없었다. 오전 5시 새벽별을 보며 일을 나갔고, 밤이 깊어서야 컨테이너 박스로 돌아왔다. 4년 가까이 일했지만 받은 돈은 없었다. 식사는 하루 두 끼가 전부였다. 김씨는 “머리 자를 때가 되면 이발비로 만원짜리 한 장 챙겨줬다”고 했다. 한겨울 그가 구조됐을 때 컨테이너 박스의 옷장에는 여름 옷가지 몇 벌과 변변치 않은 속옷 2벌만 걸려 있었다.
정씨는 2011년 7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서울의 한 중국집에서 근무했다. 숙식 제공에 한 달 80만원을 준다는 조건을 듣고 일을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1∼2시까지 하루 18시간을 꼬박 양파를 썰고, 설거지를 하고 식당 청소를 했다. 그는 “주방에서 하루 종일 일하니까 힘들었다”며 두 팔을 한껏 펴 보이며 “그릇이 많을 때는 이만큼이나 됐다”고 했다. 일을 마치면 식당 구석에 이불을 깔고 새우잠을 잤다. 그 역시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쉬지 못하고 일하면서 돈도 못 받았는데, 만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계속 시키는 것도 모자라 욕하고 이유 없이 혼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플라스틱으로 생긴 봉으로 맞기도 했고요.”(김씨)
“가장 힘들었던 것? 폭행당한 거요. 주방장이 국자로 머리를 때리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쉬는 시간이 없었던 것도요. 자다가도 새벽에 주문이 오면 깨워서 포장시키고 했거든요.”(정씨)
김씨와 정씨는 모두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였다. 김씨가 일한 딸기농장은 주인이 사촌 형이었다. 정씨는 양어머니의 소개로 중국집에서 일하게 됐다.
품삯만 못 받은 게 아니다. 둘 다 수천만원의 돈을 갈취 당했다. 김씨와 정씨 모두 지적장애 3급 장애인이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이 나오지만 모두 빼앗겼다. 김씨의 사촌 형은 월 70만원에 이르는 수급비를 자신이 받아갔고, 정씨의 양어머니도 3000만원의 수급비를 가져갔다.
두 사람은 모두 장애인 학대가 의심된다는 이웃의 신고로 구조됐다. 경찰 조사가 시작됐고, 격리조치되면서 하루아침에 노예 같던 처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미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탓에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었다.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덩그러니 일반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은 셈이다.
김씨와 정씨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쉼터에 몸을 맡겼다. 쉼터 관계자는 “김씨는 처음 왔을 때 사람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웃지도 않았다”며 “특히 남성에게 겁을 많이 냈다”고 했다. 질문을 하면 각 잡고 앉아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씨는 자기 의사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들을 보살필 국가 시스템은 거의 없었다.
마음에 아로새겨진 생채기를 치료하는 일도 민간이 맡았다. 김씨와 정씨는 지난해 9월부터 두 달간 함께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김씨의 경우는 트라우마가 워낙 깊어 치료 프로그램을 두 번이나 진행했다. 둘의 과거와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꿈을 심어주는 일이 수개월 계속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김씨와 정씨는 서로 상대가 겪은 일을 들으며 동질감을 느꼈다. 상처를 보듬으며 새로운 가족이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최근 서울 영등포구에 각자의 원룸을 얻어 나갔다. 김씨는 “같이 찜질방에 놀러갔었는데, 레몬주스도 사 마시고 땀도 빼고 했다”며 “둘이 장난치고 사는 게 정말 즐겁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 5월 첫 월급을 받으면서 기초생활수급자에서도 탈출했다. 김씨는 “(수급비는) 제 돈이 아닌데 안 받으면 좋은 것 아니냐”며 너스레도 떨었다. 정씨는 “장가 갈 때가 됐다”며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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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2-08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