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여정을 담은 ‘천로역정’은 기독교 문학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이 1678년 꿈의 형식을 빌려 영원한 생명을 찾아 떠난 남자의 순례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작품이다.
1895년 ‘텬로력뎡’으로 번역 소개된 이 책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번역된 영문 소설이기도 하다. 이번에 발간된 ‘천로역정: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CH북스)은 당시 실렸던 삽도(삽화) 42점을 함께 넣어 19세기 한국에 소개됐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책 시작에 앞서 박효은 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연구교수의 ‘천로역정 삽도 해설’을 실어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해설에 따르면 서울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가 크리스천의 순례 여정을 그린 1부를 두 권으로 묶어 처음 내놨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부인 해리엇 여사와 한국인 이창직의 도움을 받아 영문 소설과 중문본 ‘천로역정’을 참고해 공동 번역했다.
책에 실린 삽도 42점은 ‘기산풍속도’로 유명한 조선의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작품이다. 김준근은 1880∼1900년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장에서 조선인들의 삶의 풍경을 담은 그림을 대량 제작해 판매한 풍속화가였다. 1892년 원산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게일 선교사가 1894년 12월 김준근을 찾아가 삽도 제작을 맡겼다고 한다.
당시 김준근은 1860년대 출간된 로버트 맥과이어 목사의 주석본 ‘천로역정’에 실린 19세기 영국화가 헨리 셀루스와 파올로 프리올로의 삽화를 참고하되, 한국적인 풍속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전체 구도는 영문본 삽화를 따랐지만 인물의 모습은 한국인 그대로 구현했다. 김준근은 죄짐을 진 크리스천을 박물상 가장의 등짐을 진 모습으로 대체했고, 예수는 갓 쓰고 도포 입은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김준근의 작품은 한국 초기 기독교 미술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갓 쓴 예수의 모습은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피난처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5월 문화재청은 ‘텬로력뎡’의 초판본 2종(목판본과 신활자본) 5책을 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했다.
CH북스는 이 책이 한국에 처음 소개됐을 당시의 감동을 재현하고자 이같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한다. 길선주 목사가 ‘텬로력뎡’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기도하던 중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울면서 회개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출판사 측은 “길선주 목사님은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 ‘텬로력뎡’을 읽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냈다”며 “그때 그 시절, 그들 열정의 원동력이 됐던 ‘텬로력뎡’이 오늘 이 시대에도 하늘나라를 열렬히 소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천로역정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는 독자들에게 천로역정 완독에 도전할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책이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갓 쓰고 도포 입은 예수님, 등짐 진 크리스천… 한국적 천로역정 보셨나요
입력 2018-02-08 00:00 수정 2018-02-08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