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64년, 현대미술의 주도권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 수상과 더불어 미국으로 넘어갔고, 이후 뉴욕이 현대미술의 주류를 만들어내는 도시가 되었다. 전후 뉴욕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앤디 워홀일 것이다. 워홀은 ‘아메리칸 드림’을 예술로 구현한 대가로 전후 미국 미술, 더 나아가 미국의 상징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워홀은 메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 케네디나 마오쩌둥 같은 유명인사의 이미지에 코카콜라 같은 이미지까지 불러들여 푸짐한 잔칫상을 차렸다. 팝아트가 차린 이 잔칫집 분위기는 매우 낙천적이어서 우중충해 보이는 유럽의 엘리트주의 미술과는 달랐다. 대중적이라는 점이 부각되었고, 그 덕에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자코메티의 예술은 잔칫집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을 하객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이는 두 번의 대전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세계가 결코 팡파르를 울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는 서구의 자부심이었던 이성과 계몽의 시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과정을 목격했다. 공을 들였던 과학과 기술이 대량살상무기와 고문기계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그것들이 동료와 이웃들을 하루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조문객이라면 모를까, 더는 사람들을 축하객으로 부를 수는 없는 세계, 그것이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이 조각가가 경험한 인간은 이타성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기주의적이지도 못한 부조리한 존재다. 퀭한 눈두덩에서 앙상하게 마른 사지에 이르기까지, 피폐하고 상처투성이며 이방인일 뿐인 존재다. 그가 만든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그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가? 가야만 하는 목적지가 있기는 한 것인가? 최소한의 암시조차 없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단지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멈춰선 안 되기에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들을 따르노라면 어느새 우리는 인생의 기저에 이르게 된다.
워홀의 이미지들이 할리우드에서 디즈니랜드로 이어지는 삶의 환희를 모티브로 다루었다면, 자코메티의 조각에선 반짝거리는 것이라곤 없는 ‘출구 없는’ 삶과 유일하게 확실한 죽음이 그 유일한 이정표였다. 워홀은 그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스스로 그들 중 한 명이기를 욕망하면서 600명이 넘는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반면 자코메티는 60∼70㎏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보통의 인간조차 자신의 조각으로 재현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그는 거꾸로 끊임없이 욕망에 겨워하는 존재의 그 욕망의 무게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덜어내고 또 덜어냈다.
이상한 것은 자코메티의 이 앙상한 인간들이, 우리의 자화상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삶의 환희에 취해 잠시 묻어두었던 우리의 진정한 모습들, 예컨대 메마름이나 공허함, 혼돈과 다시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환희에 너무 취해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너무 많은 ‘우리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 주는 것들’에 둘러싸일 때, 그것은 인생에 주어지는 경고일 개연성이 크다. 자코메티가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깨달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당혹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새삼 떠오르는 생각이다.
심상용 교수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Why? 자코메티] 삶의 환희를 구현한 워홀… 그 근원에 천착한 자코메티
입력 2018-02-07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