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집회 나온 100여명
김정은 사진·인공기 태우며
“너희 나라로 가라” 외쳐
배에선 아무도 하선 않고
대기 중이던 차량도 꼼짝안해
일부 멀미 때문이란 분석도
6일 오후 4시19분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서 보이기 시작한 만경봉 92호는 높은 파도로 선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부두에 나온 시민들이 “배가 넘어질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배 꼭대기인 선수 8층 외부공간에는 노란색 안전모를 쓰고 검은색 외투를 입은 북한 관계자 5명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 측 도선사를 포함한 이들은 부두를 향해 인사를 하듯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이들은 오후 4시35분쯤 배가 방파제 안쪽으로 들어서자 팔 흔들기를 멈췄다. 방파제와 부두에는 대한애국당 등 태극기 집회를 벌이는 이들이 100여명 나와 있었다. 한반도기를 흔들며 만경봉 92호를 반기는 인파는 10명 안팎의 소수에 그쳤다.
태극기 집회 인파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사진과 인공기를 불태웠다. 이들은 배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저들을 영토에 들이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갑판에 나온 북한 관계자들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42분 예인선 2대가 만경봉 92호를 묵호항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배가 완전히 멈추자 태극기 집회 인파는 더욱 큰소리로 폭언을 쏟아냈다. 집회 인파는 경비를 위해 출동한 경찰 병력 8개 중대와 거세게 충돌하며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2002년 10월 15일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며 부산 다대포항을 떠났던 만경봉 92호는 이렇게 다시 대한민국에 닿았다.
부두에는 관광버스 5대와 미니버스 1대, 스타렉스 1대가 대기 중이었다. 삼지연관현악단 인사들을 8일 공연하는 강릉아트센터로 데려갈 차량이었다. 하지만 만경봉 92호에서는 아무도 하선하지 않았고, 차량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정박한 이후 통일부와 관세청 등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배에 올랐지만 오후 7시쯤 모두 나왔다. 태극기 집회 인파가 해산한 이후에도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통일부 관계자는 오후 7시를 넘겨 “이날 중 북측의 공식 일정이나 이동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시간 항해 끝에 정박하고서도 아무도 땅을 밟지 않자 부두에서는 많은 추측이 오갔다. 인공기 화형식 때문에 북한 인사들이 하선을 거부했다는 해석이 많았다.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했던 이들임을 고려하면 항의의 의미 이외에 하선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해석이었다.
높은 파도로 승객들이 멀미를 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돌았다. 입경 절차를 밟고 버스로 강릉까지 이동, 추가 일정을 수행하기에는 피로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만경봉 92호에는 숙박 시설도 있다. 다만 통일부는 북한 예술단이 내리지 않은 이유를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2002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우리 측의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만경봉 92호는 이날 선미에 인공기를 게양한 채 접안했고, 정박 이후에도 인공기를 그대로 뒀다. 만경봉 92호는 2002년 부산 다대포항에 들어올 때에는 부두로부터 50m 지점에서 선미의 인공기를 하기(下旗)하고 한반도기를 내걸었다.
만경봉 92호를 보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서 묵호항에 나온 이경선(52)씨는 “같은 민족이고 평창올림픽이 잘되라는 의미에서 응원을 나왔다”며 “다른 사람들은 단체에서 나온 것 같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묵호항에서 인공기를 불태우던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은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든 문재인 좌파정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해=이형민 심우삼 기자 gilels@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인공기 화형에 뿔났나… 北 인사들 하선 거부
입력 2018-02-06 22:23 수정 2018-02-06 2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