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과 달리 ‘경영권 승계 작업’ 인정 안해… 항소심 분석

입력 2018-02-05 18:38 수정 2018-02-05 21:42
사진=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재판을 받기 위해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왼쪽)이 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은 재판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장충기 전 차장. 구속 상태에서 재판받았던 두 전직 삼성 임원도 이 부회장과 함께 석방됐다. 뉴시스
범행의 근본 전제 사라져
부정한 청탁도 성립 안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삼성 겁박한 사건” 규정

이재용, 선고 내내 침착
법정 빠져나오자 활짝 웃어


“피고인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한다. 다만 형의 집행을 4년간 유예한다.”

5일 오후 3시30분 서울법원종합청사 312호 법정. 재판장이 주문을 읽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애써 덤덤한 척했다. 구치소 짐을 챙기기 위해 법원을 빠져나온 이 부회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활짝 웃으며 호송차에 올랐다. 1심에서 각각 징역 4년을 선고받았던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전 차장도 이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황성수 전 전무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 부회장이 석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소심 재판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이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각종 지원에 들어갔다고 법리를 구성했다. 1심 재판부도 포괄적 현안에 대한 묵시적 청탁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승계 작업이 존재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부정한 청탁을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정청탁을 구성 요건으로 하는 제3자 뇌물공여죄는 자연스럽게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논리적 결과로 영재센터 지원금 16억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원에 대해서 모두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 돈에 대한 횡령죄와 범죄수익은닉죄도 자동으로 무죄가 됐다.

뇌물로 인정된 부분은 승마지원금 일부다. 코어스포츠용역대금 36억원과 마필 및 선수단 차량을 무상으로 쓴 ‘사용 이익’만 뇌물로 인정했다. 단순뇌물공여죄가 적용된 승마지원의 경우 제3자 뇌물공여죄와 달리 부정청탁 여부는 입증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의 직무관련성, 대가성만 따져보면 된다. 재판부는 “용역대금은 최순실씨가 임의로 사용했고, 그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개인지원금이 됐다”며 “피고인들도 이러한 점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고급 마필 등 36억원 상당도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필에 대한 소유권이 삼성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엄마가 삼성 말 네 것처럼 타라고 했다’는 정씨 진술은 소유권이 삼성에 있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유일하게 뇌물로 인정된 36억원에 대한 재산국외도피죄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향후 해외에서 임의로 사용하기 위해 국내에 있는 재산을 은밀히 빼돌리는 도피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뇌물을 공여할 의사로 돈을 보낸 것이지 국외로 도피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삼성 측이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공여한 뇌물은 36억원만 인정됐다. 특검이 공소제기한 뇌물액 298억원에 비해 대폭 줄어든 규모다. 재판부는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 경영진을 겁박하고 그 위세를 등에 업은 사인(私人)이 사익을 추구한 사건”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특검이 공소제기한 298억원 중 인정된 뇌물은 36억원”이라며 “이에 비춰보면 특검이 규정하는 ‘정경유착의 전형’이라는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여진다”고 부연했다. 즉 삼성 측이 국정농단 사건에서 피해자에 가깝다는 게 재판부 결론이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