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다 행복했지. 학교 정문 지나 오르막길 향할 때는 젊은 친구들이 꼭 ‘할머니’ 하며 달려와 손잡아 주는디 월메나 고마운지…. 한글도 못 쓰던 까막눈이 대학 졸업이라니 지금도 이게 뭔 복인가 싶어.”
5일 오전 수화기 너머 건네지는 오점녀(85) 할머니의 목소리에선 떨림과 감격이 오롯이 전해졌다. 문득 지나온 생의 순간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떠오르는지 마디와 마디 사이의 호흡은 점점 길어졌다. 오는 9일 학사모를 쓰는 오씨는 전북 완주군 왜목로 한일장신대(총장 구춘서) 인문사회과학부 NGO학과 졸업예정자다. 1932년생인 그는 최고령 졸업생에 이름을 올렸다. ‘최고령 졸업’ 타이틀은 4년 전 전북도립여성중고등학교(교장 유진순) 졸업식에 이어 두 번째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풍남보통학교를 졸업한 오씨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온갖 역경을 겪었다.
“오빠들은 여기저기로 강제노역에 끌려가고 아버지는 전쟁통에 병을 얻어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지. 떨어진 거 주워 먹고 구멍 난 옷 기우기 바쁜디 공부는 무슨. 직조공장서 일하다가 결혼하고 나선 두 딸과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응어리처럼 박혀있던 배움에 대한 열망은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나서야 꿈틀댔다. 노인복지회관에서 한글과 컴퓨터를 배우며 60여년 만에 학교 문을 다시 두드렸다. 매일 아침 굽은 허리에 책가방을 메고 지팡이를 짚으며 등교하는 그의 모습은 한일장신대의 명물이었다. 지난해 9월 허리를 다쳐 추석연휴 전후로 수술을 받고 휴식을 취한 것을 빼곤 4년 내내 개근했다.
주 2회 진행되는 채플 시간엔 학생들 사이에서 ‘사탕 할머니’로 통했다. 오씨는 “옆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주려고 챙기던 게 습관이 된 것”이라며 “신입생 중엔 근처 교회에서 전도하러 온 할머니인 줄 아는 학생도 있었다”며 웃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채플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는 그는 “전엔 성경을 못 읽는 게 창피해 교회에 안 갔는데 이제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해 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교내에선 오씨를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라고 치켜세운다. 그가 보여준 섬김 때문이다. 2015년 한 강의동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땐 주머니를 털어 20만원을 보탰고 지난해 12월엔 “4년 동안 장학금 받으며 학교 다니게 해 줘 감사하다”며 발전기금 200만원을 쾌척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오씨가 수당으로 받는 돈을 모아 기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구춘서 총장은 “오점녀 학생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강조했던 학교 설립자 서서평 선교사의 표본을 보여줬다”며 “나이를 제약으로 보지 않고 성실함과 열정으로 극복한 그의 모습이 청년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측은 학교생활에서 인성 지성 영성의 모범이 된 학생을 격려하기 위해 ‘한일모범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로 오씨를 선정했다. 오씨는 졸업 후 한일장신대 NGO정책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사의 꿈을 펼칠 예정이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한글도 못 쓰던 까막눈이 85세에 대졸 학사모 쓴다
입력 2018-02-06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