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5> 양기주 장로

입력 2018-02-03 00:01
양기주 장로가 2014년 독일 베를린소망교회 장로 임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양 장로는 교회 선교부장을 맡고 있다. 양기주 장로 제공
양 장로(왼쪽)가 동료 간호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양기주 장로 제공
1975년 독일 광산 기숙사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양 장로(왼쪽). 양기주 장로 제공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기억은 늘 시간의 저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엄습한다. 익숙한 통증은 없듯이 아팠던 자리가 다시 아파도 늘 새롭다. 양기주(70) 장로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를 원망했다. 2007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망설여졌다. 하지만 피의 이끌림은 고국으로 발길을 옮기게 했다.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아버지, “교회는 상놈들이나 다닌다”며 비웃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렸다.

앙상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울며 기도하는 순간, 회복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하나님 품에 안겨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증오의 연못에서 헤어 나왔다.

그의 유년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자유당 시절 신익희 조병옥 선생을 따라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재산만 탕진했다. 7남매의 둘째였던 양 장로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농사일을 도와주며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곧바로 군대를 자원했고, 3년 복무 후 나온 세상은 파독 근로자 모집으로 떠들썩했다. 경쟁률이 치열했다. 1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합격했다. 처절하고 남루한 일상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1974년 11월 도착한 독일 딘스라켄 인근의 발줌 광산은 겨울바람으로 스산했다. 광산의 하루는 힘겨웠다. ‘샤크텐’이라고 불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 지하 막장으로 내려가면 갱내열차들이 기다렸다. 갱내열차로 한 시간을 타고 가면 석탄을 캘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석탄을 곡괭이로 찍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폭파시키는 과정에 사고가 많았다.

석탄을 캐낼 때 동반이라는 기둥을 세우는데 큰 쇳덩어리였다. 동반이 무너지면서 죽거나 다친 동료들이 많았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일이 끝나 지상으로 올라오면 석탄가루로 뒤덮인 몸을 씻으며 이국생활의 허무와 슬픔을 쓸어내렸다. 그는 매달 버는 월급에서 50마르크만 남겨두고 전부 고국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가족은 생계를 유지했고, 동생 2명은 대학공부를 마쳤다.

투쟁 같은 삶을 사는 동안 광부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갔다. 저금한 돈도 없었기에 고국에 돌아가기 두려웠다. 당시 파독 광부들에게 파독 간호사와의 결혼이 유행했다. 체류와 결혼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백림(서베를린)에 간호사들이 많다고 소문이 났어요. 주말이면 총각들이 5명씩 그룹을 지어 9인승 버스를 타고 올라왔지요. 한인 간호사들이 순복음교회에 많다기에 그날 무조건 교회로 향했어요.”

금요철야기도 시간이었다. 당시 베를린순복음교회(김남수 목사 시무)에는 한인 간호사들이 많았다. 그날 김 목사는 오랜만에 젊은 남성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자매들 사이에 앉게 했다. 양 장로는 이렇듯 교회와의 첫 만남을 설레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당시 옆자리에 앉은 자매가 바로 아내 박화란 집사다.

“새벽까지 기도모임이란 걸 하고 나니 간호사들이 자신들의 기숙사 방을 하나 내주고 우리를 묵게 해주더군요. 그날 마음이 정말 편안했어요.”

박 집사를 만나러 베를린순복음교회를 드나들면서 차츰 믿음이 자랐다. 당시 신앙이 있는 광부들끼리 예배모임을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광산 내 작은 기숙사교회도 만들어졌다. 그는 모임을 통해 삶 전체를 걸어도 아깝지 않은 복음을 만났다.

양 장로는 77년 결혼을 하고 아내가 있는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자격증을 취득해 용접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용접일을 하면서 회의감이 몰려왔고 급기야 우울증이 찾아왔다.

“아내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어요. 하지만 아내는 ‘자신은 독일이 좋고 간호사 직업은 하나님이 주셨다’며 가려면 혼자 가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안을 하더군요.”

간호사 교육이었다. 사실 간호사가 여성만의 직업이라는 편견이 있었기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급물살처럼 간호사의 길로 이끄셨다. 81년 간호보조원으로 시작해 병원 측의 권유로 3년 교육 후 정식 간호사가 됐다. 간호사는 생명을 살리고 남을 섬길 수 있는 헌신의 통로였다. 양 장로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갈렙의 고백으로 환자들의 영육구원에 힘썼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초조해지는 2세 문제,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양 장로 부부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3년 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이었다. 하나님은 기도 중에 입양에 대한 마음을 주셨고, 이후 태어난 지 3주된 딸을 한국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딸의 이름을 ‘미마’라고 지었다. 욥기의 마지막 장의,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 ‘여미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양 장로 부부는 헌신적으로 미마를 양육했다. 사춘기 소녀로 방황하며 일탈하는 딸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갔다. 딸은 더 낮아지게 하는 겸손의 도구였다.

“그 아이 손을 잡고 울며 기도했어요. 매일 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리면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간절히 알아갈 수 있었어요.”

미마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의 사랑과 기도의 힘에 반응하며 회복돼 갔다. 양 장로의 기도제목은 가슴으로 낳은 딸 미마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