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 고갯길은 간간이 차가 한 대씩 지날 뿐이다. 충북 제천시가 고개 정상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와 장승 등 다양한 설치물을 조성하고 공원화했지만, 사람들은 고개 지하터널을 이용해 빠르게 서울 방향으로 달렸다.
한국 신학의 기초를 닦은 최병헌 목사라는 인물이 있다.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에 이은 서울 정동교회 2대 목사다.
그의 호는 탁사(濯斯)다. 한국교계는 통상 ‘탁사 최병헌 목사’로 부른다. 탁사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에 의해 한국 선교가 시작된 18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사역의 길을 걸었다. 여명기 한국교회 초기 목회자이다. 또 이식된 신학을 한국화한 첫 신학자이기도 하다.
‘탁사’라는 말은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의 한시 어부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큰 바다 푸른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더러우면 내 발을 씻는다’에서 ‘씻을 탁’과 ‘떠날 사’를 취했다. 성리학의 토양에서 자란 최병헌이 복음을 진정한 도(道)로 받아들이고 발을 씻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호라 할 수 있다.
박달재 정상에서 12㎞ 지점에 탁사정이란 정자가 있다. 지난 주말 박달재에 앞서 찾은 곳이 탁사정이었다. 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제천천 계곡을 아래로 둔 탁사정은 제천군 현좌면 신월리(현 제천시 신월동) 출신 최병헌의 호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당대 제천이 낳은 선각자이자 서학에 능통한 학자가 최병헌이었고, 서울 정동교회와 상동교회를 근거지로 개화운동을 펼쳤던 인물이었기에 지역민에게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탁사정은 조선 선조 때 세워져 팔송정으로 불리다가 1925년부터 탁사정으로 개칭됐다.
다시 박달재. 이 고개는 문경새재, 단양 죽령 등과 함께 조선 청년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길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동냥글을 배워야 했던 최병헌에게도 금의환향을 위한 인생의 고산준령이었다.
성경 분석한 ‘유교 엘리트’
그러나 그는 과거에 번번이 낙방했다. 때는 19세기 말이었고, 조선의 과거제도는 부정이 만연했다. 최병헌이 남긴 과장(科場)의 풍경.
‘꿈을 안고 수백수천 리를 바삐 와서 글 한 장으로 인생운명을 바꾸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과장은 몇몇 유력자의 농락장이 되고… 소위 권문대가라 하는 사람들은 문벌계급만 가지고 사람을 취하였다. 다시 말하면 유력자 자식이라야 사람일 뿐 하층 사람은 재덕도 쓸데없고 지식도 쓸데없다. 어찌해야 대국(大局)을 바로잡고 민중을 향상케 할 것인가.’(1927년 ‘신학세계’ 12권 2호 ‘탁사 최병헌 선생 약력’ 중에서)
마치 오늘날 공공기관 채용비리와 다를 바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 벌어졌던 모양이다. 이 같은 좌절은 그보다 17세 적은 이승만 전 대통령도 비슷하게 겪었다. 같은 배재학당 출신인 두 사람은 과거 낙방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그들은 깊은 좌절에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좌절을 통해 세계관을 달리했다.
탁사는 한학에 능통한 천재소년이었다. 그는 고향 신월리를 떠나 충북 보은군 내북면 사막리(현 보은읍 봉평리)의 먼 친척 최직래의 양자로 입적해 공부를 계속했다. 탁사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양부모는 서울 회현방 상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양부모는 병을 얻어 누웠고 병 치료를 위해 상동 집을 팔고 황화방 정동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됐다. 정동에서 양아버지가 죽었다.
그는 약값과 장례비용 지출이 커 도시 빈민이 됐고 다시 사막리로 내려가 양모와 친부모를 부양하며 살았다. 와중에도 과거에 계속 응시했다. 그 가운데 임오군란(1882년)이 일어나고 나라는 무법천지가 됐다. 1888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는 정동교회 근처에 살며 신문물을 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한국 감리교의 토대를 쌓은 조지 H 존스(1867∼1919)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가 된다.
아펜젤러도 존스를 통해 만났다. 두 선교사와 탁사는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기도 모임을 가졌다. 1889년 탁사는 배재학당 한문 교사가 된다.
하지만 뼛속까지 유교를 숭상하고 있던 탁사는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 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뿌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유교 엘리트답게 성경을 분석했다. 아펜젤러와 존스 역시 유교문화권 선교를 위해 탁사와 같은 유교 엘리트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탁사는 1893년 2월 8일 마침내 존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양 기술과 기독교 전폭 수용해야”
그 무렵 조선은 주자학적 유교사상이 제사로 상징되는 우상화로 치달아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다. 죽은 자를 두고 산 자들이 싸웠다. 양반의 허례 때문에 고난 받는 백성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조선말 정치세력은 크게 위정척사파,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로 나뉜다. 척사파의 이항노 기정진 최익현, 온건파의 김윤식 김홍집 신기선, 급진파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충돌을 빚고 있었다.
급진파는 ‘종교가 흥하면 나라도 흥하고 종교가 쇠하면 나라도 망한다’는 관점에서 유교를 대신할 기독교를 수용했다. 백성의 교화와 교육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탁사의 맥락은 급진파에 닿았지만 제3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회개혁 너머 ‘실존적 구원으로서의 복음’을 얘기했다. 동도동기(東道東器)도,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닌 대도대기(大道大器) 입장이었다. 서양의 기와 함께 서양의 도인 기독교를 전폭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서양의 하나님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비교종교학 관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임을 확신했다.
탁사는 한때 김홍집 내각(1895)때 농상공부에서 일하며 기독교 문서사업에 헌신했다. 1895년 아펜젤러와 ‘조선회보’를 창간했고, 1897년에는 한국교회 최초 신문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해 주필이 됐다. 또 ‘신학월보’를 통해 한국 최초의 신학논문집 ‘죄도리’를 발표했다. 그리고 1910년대 종교에 깃든 기독교 정신을 담은 ‘성산유람기’를 연재했고 이것이 1912년 ‘성산명경’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비교종교학 ‘사교고략(四敎考略)’ 연재도 신학월보를 통해 진행됐다.
탁사는 한국적 신학 연구에 한평생을 바쳤다. 신학자 유동식 전 이화여대 교수는 “당시 선교사들의 개인 구원관과 관점이 달랐던 그는 복음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민족적 상황의 소산으로 봤다”고 말한 바 있다. 더불어 탁사의 정동교회 목회, 독립협회 및 YMCA운동 참여, 애국계몽운동 등은 사회구원을 향한 실천이었으며 이를 체계화한 것이 한국적 신학의 뼈대가 됐다는 것이다. 고 변선환 감신대 교수는 “탁사는 인간이 자유와 자주, 평화를 원하지만 그 나라의 정치는 결국 그 나라의 종교 여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고 평가했다.
‘실족’ 흠에도 한국 신학의 태두
그의 고향 신월동은 현재 세명대 대원대 등이 들어선 대학촌이 됐다. 제천시는 수년 전부터 탁사기념관 조성을 추진했으나 일부 지역 시민단체가 탁사의 의병 순무사 전력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좌절됐다.
최병헌은 말년 교권을 쥔 탁사(託事·교회에 딸린 토지 건물, 비품 따위의 보관이나 수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교직)로 재정관리에 따른 구설을 낳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개화운동가와 신학자로서의 공을 가릴 만큼 위중하다고 보긴 어렵다.
박달재 고개 정상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옆에 의미 있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이 노래 작사가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행위를 알리는 내용이다. 탁사의 한국교회 헌신과 인간적 실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 알리면 된다. 지방자치단체가 탁사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애쓰는 마당에 한국교회가 특정 교파 사람 또는 실족 등을 이유로 묻어 버리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이 아니다.
탁사를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한 동년배 사역 동지 아펜젤러
탁사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선교사 아펜젤러다. 그가 배재학당 한문 교사가 됐을 때부터 동년배로서 사역 동지가 된다.
그는 아펜젤러를 도와 주일학교 교사가 됐고 전도사가 됐다. 아들이 죽었을 땐 공덕리(서울 공덕동) 장례 집례를 아펜젤러가 했다. 1899년 1월 아펜젤러가 만국기도회에서 ‘산제사’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때 탁사는 그 자리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했고, 1901년 2월 아펜젤러가 눈보라 속에서 정몽호라는 노인에게 나무와 양식을 몰래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신앙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1902년 6월 아펜젤러는 목포 성서번역 모임 참석차 배편을 이용해 가던 중 서해 어청도 부근서 해상 사고로 소천한다. 그때 탁사 꿈에 아펜젤러가 세 번이나 나타난다. 마지막 꿈에서 아펜젤러는 “모처에 기도회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연보
1889년 배재학당 한문 교사
1893년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 받음
1895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관직 및 조선회보 창간
1896년 독립협회 설립 참여 및 엡윗청년회 조직
1897년 조선 그리스도인회보 창간
1898년 성서번역위원
1900년 전도사로 정동교회 치리 및 신학월보 창간
1902년 목사 안수, 아펜젤러 소천
1903년 정동교회 담임 목회
1900∼12년 ‘성산명경’ 등 저술 활동
1914년 인천지방 감리사
1918년 내외국인선교회 초대회장
1923년 협성신학교 교수
제천·보은=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한국기독역사여행] 뼛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를 따르다
입력 2018-02-03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