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이후 수습 시절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십수 년 전 지금 이맘때인데 하루 2∼3시간만 잠을 자면서 경찰서를 돌고 각종 현장을 전전했다. 살을 에는 추위, 쏟아지는 잠과의 싸움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참 하기 싫고 꺼려지는 취재가 있었다. 장례식장 취재였다. 매일 반복되는 새벽 취재 중에 대형병원 장례식장 3∼4곳을 들러야 했는데, 가끔 유가족에게 물어 망인의 사망 원인이나 사연을 알아내야 했다. 고인을 상실한 슬픔에 빠진 채 밤새 조문객을 맞았을 유가족에게 낯선 이가 다가와 다짜고짜 “무슨 사연이 있나요”라고 묻는 것은 참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랴. 일이니. 취재 도중 유가족에게 욕설을 듣거나 등짝을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수습을 마치고 난 뒤 새벽 병원 장례식장 취재의 고통에서 해방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재난이나 범죄 피해를 입은 관련 유가족을 취재하는 일은 늘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전방에서 총기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 곁에서 함께 울어주지 못하고 “그런데 아드님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나요”라고 물어 기사를 써야 했던 처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로 정치권이 욕을 먹고 있다. 참사 현장을 찾은 제1야당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유가족을 앞에 두고 “정부가 아마추어라 예방 행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 같다”며 정부 탓을 하기 바빴다. 화재 유족에게 항의를 받자 “민주당 애들”이라는 막말도 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도 화재 현장을 찾아 “정부가 북한 현송월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며 뜬금없는 색깔론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문재인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다소 하락하는 기미까지 보이자 야당 입장에서는 더욱 신이 났을 것이다. 한국당의 공격이 거세지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발끈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이 직전 이곳 행정의 최고책임자가 누구였는지도 한번 봐야겠다”고 맞받아쳤다. 직전 경남지사였던 홍 대표를 겨냥한 것이다.
깊은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을 앞에 두고 벌인 여야의 기막힌 네 탓 공방에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지만, 정치권은 자신이 벌인 추태를 뉘우치지 않았다. 오히려 홍 대표는 “언론이 밀양 사고를 양비론과 정쟁으로 몰아 야당을 비난한다”고 언론 탓을 했다.
참사 책임을 둘러싼 여야 간 장외 설전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뒤늦게 국회가 바빠졌다. 여야는 2월 임시국회가 열린 첫날인 30일 상임위에 계류 중이던 소방안전 관련 법안 3건을 본회의까지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특히 이날 통과된 소방기본법 개정안은 2016년 11월 발의됐지만 1년 넘게 논의도 되지 않다가 제천과 밀양에서 화재로 대형 인명사고가 연이어 터지고 난 이후에야 간신히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20대 국회 초반부터 최근까지 국회에는 다양한 소방안전 관련 법안이 제출됐다. 소방차 등 긴급자동차의 통행로 확보 방안이 담긴 도로교통법 개정안(2017년 3월 발의)이나 공동주택에 소방차전용 주차구역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내용의 소방기본법 개정안(2016년 11월 발의) 등이 대표적이다. 기존 법안에 안전상 허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천 화재 이전까지 해당 법안에 대한 검토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법안 처리를 미루다 사고가 터진 뒤 수습에 나서는 국회의 뒷북 행태는 예전부터 반복돼 왔다. 대표적으로 해양 안전을 강화하는 내용의 해사안전법 개정안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13일 만에 처리됐다.
여야 정치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보였어야 했던 모습은 진정으로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소방안전 관련 법안은 내팽개친 채 정쟁만 일삼았던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었다. 그게 유가족에게 보였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였다. 정쟁도 좀 때와 장소를 가리고 눈치도 봐가면서 하자.
노용택 정치부 차장 nyt@kmib.co.kr
[세상만사-노용택] 정쟁도 장소 가려서 하자
입력 2018-02-01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