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도 ‘사후약방문식 입법 행태’ 자성의 목소리
반대 위한 반대 하다보니
좋은 법안 물밑에 가라앉아
국민 생명과 안전은 뒷전
정치문화 근본적 변화 필요
국회가 국민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법안을 수개월씩 방치하다 큰 사고가 터진 뒤에야 여론에 이끌려 처리하는 행태가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국회 내에서도 이 같은 사후약방문식 입법 행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련의 법안들이다. 국회는 해사안전감독관제를 도입해 해양 안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내용의 해사안전법 개정안을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처리했다.
이 법안은 직전 해 12월 발의됐던 법안이다. 또 이른바 ‘수학여행안전법’으로 불리는 학교 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법 개정안은 2013년 8월 고교생 5명이 사망한 태안 해병대 사고를 계기로 발의됐지만 8개월이나 국회 캐비닛에 잠들어 있었다. 이 법은 수학여행 등을 실시할 때 학교장이 안전대책 마련 등 필요 조치를 강구하도록 명시한 법으로 해사안전법 개정안과 함께 2014년 4월 29일 처리됐다.
지진 관련 법안 처리 과정도 다르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2016년 9월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하자 지진 안전 관련 법안을 앞 다퉈 발의했다.
건축주가 비건설업자일 경우 직접 시공할 수 있는 범위를 200㎡ 이하로 제한해 건축물의 안전성을 향상시키자는 내용의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과 내진설계 기준 적용 대상 시설을 확대하고, 원자력발전 시설을 단층 조사·연구 대상에 포함시키는 지진·화산 재해 대책법 개정안 등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수개월씩 국회에 묶여 있다 2017년 11월 포항 지진 발생 후에야 황급히 처리됐다.
성폭력 범죄 관련법도 마찬가지다. 성폭력 전과자의 출소 후 범죄가 이어지자 정부는 2009년 전자발찌 착용 기한을 늘리는 등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특정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2010년 2월 부산 여중생 납치살해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 달여 만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민 생명·안전 관련 법안들이 이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처리되는 것에 대해 의원들로부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한 재선 의원은 30일 “의원들이 법안 발의에만 집중하다보니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너무 많이 발의돼 집중하기 어렵다. 또 원내 지도부나 상임위 간사가 주목하지 않으면 상임위 상정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발의 후 일정 시한 내 법안심사소위에 회부되지 못한 법안들에 대해 상임위 내부에서 강제적으로 재검토하는 기구나 협의체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야당 의원도 “의원들은 자신이 발의한 법안의 임기 내 처리 결과를 공표하고, 장관들 역시 부처에서 발의한 관련 법안의 처리 성과를 평가받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며 “특히 정부는 이번 화재 사고를 계기로 법률안뿐 아니라 각 시행령의 안전 관련 규정도 점검·보완해야 한다”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치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주문했다.
박상병 인하대 교수는 “여야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환경에선 상대방에게 유리할 수 있는, 좋은 법안은 서로 안 통과시켜주려는 마음이 크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보니 정작 필요한 법안은 물밑에 가라앉는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도 “제도적 보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며 “국민의 안전이나 행복, 기본권 등과 관련된 법안은 당리당략을 떠나 충실하게 입법할 수 있는 정치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최승욱 신재희 기자 applesu@kmib.co.kr, 사진=최종학 선임기자
세월호 겪고, 여중생 피살 후, 포항 지진 후 ‘뒷북 입법’
입력 2018-01-31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