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학이 모순적이라기보다 범주가 다른 학문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가 있다. 마틸다 이모가 멋진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케이크를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에게 가져가 설명을 요청하면 친절히 답해줄 것이다.
물리학자는 케이크의 입자 구조를, 생화학자는 케이크 안에 있는 단백질과 지방의 구조를 세세히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질문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케이크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케이크가 왜 만들어졌는지 답변할 수 있는 존재는 마틸다 이모뿐이다. 그가 케이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학의 한계와 신학의 역할이 분명히 나타난다.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과학은 진리로 갈 수 있는 유용한 도구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다.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저자는 “과학 연구에 헌신하는 최고 수준의 학자가 되는 것과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질문도 있음을 깨닫는 것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고 말한다. 과학만이 진리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며 신학이 ‘망상의 산물’이라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신학은 과학만큼이나 합리성을 전제한다. 케이크가 만들어진 목적을 알려주는 마틸다 이모의 설명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대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케이크의 성분과 입자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신학은 과학이 제공하지 않는 정보를 처리하도록 돕는다. 신이 인간과 우주를 왜 만들었는지 알려주는 계시는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이성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갈등은 과학과 신학 사이가 아니라 자연주의와 유신론이라는 세계관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여기서 자연주의는 “우주는 존재하고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라는 칼 세이건의 말로 요약된다. 별도의 설계자 없이 자연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보는 무신론적 관점이다.
문제는 자연주의와 결부된 무신론적 과학주의 역시 과학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존재의 모든 측면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믿음에 근거한다. 저자는 과학주의가 옳다는 주장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 과학 분야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될 수 없으므로 참일 수 없다고 꼬집는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라며 던지는 골치 아픈 질문에 대한 반박은 속 시원하진 않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저자는 먼저 무신론자들 역시 우주 자체를 궁극적 실재라고 보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영국 철학자 오스틴 파러의 말을 빌려 “무신론자와 신자를 가르는 문제는 어떤 사실이 궁극적인가 하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무신론자들에게 우주가 궁극적 실재라면 유신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제1원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가라’는 소크라테스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 위에서 생명의 기원, 진화론 등의 뜨거운 이슈에 대해 무신론이 과학의 필연적 결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치열하게 논증한다. “과학은 결코 하나님을 외면하지도 매장하지도 않았다”는 저자의 담대한 선언이 인상적이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신학이 망상의 산물? 무신론자들이 틀렸다
입력 2018-02-0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