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착한 영화, 좋은 영화

입력 2018-01-30 17:39

영화는 다른 장르보다 자본의 논리가 강하다. 스크린에 투자자 이름이 가장 앞서 오르는 이유다. 그렇다고 돈만으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시나리오와 연출, 연기,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고양된 상상력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말석이나마 예술 대접을 받고, 국가예산을 들여 영화를 진흥한다. 이를 뒤집으면 문화적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하면 영화예술이 존립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근래 개봉작을 보면 예술로서의 영화의 본령에 충실하기보다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걸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착한 영화가 곧 좋은 영화는 아닌데도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가는 측면도 있다.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에서 보듯 나름의 드라마적 장치를 갖추거나, ‘도가니’처럼 기존의 미디어가 포기한 역할을 해내는 노력 없이, 스토리나 메시지에 과도하게 기대는 경우를 본다. 어깨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착한 영화 가운데 하나가 ‘아이 캔 스피크’다. 위안부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 웃음과 감동을 자아내는 미덕이 있다. 관객의 호응도 컸고, 나문희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의 영예까지 누렸다. 그러나 구성은 탄탄하지 못했다. 단서를 너무 쉽게 노출시켜 스스로 스포일러가 될 정도였다. 인물의 정형화는 답답함을 주었다. 공무원 이제훈의 원래 꿈이 건축가였다며 ‘건축학개론’을 이어받았고, 손숙도 ‘귀향’의 위안부 할머니 캐릭터를 승계했다. 뻔한 흐름, 뻔한 결말은 창작의 적이다.

‘1987’은 어떤가. 화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 타, 타” 타자 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이니셜이 사건사고와 더불어 등장한다. 자료를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에 충실했다. 대부분 공개된 내용이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영화창작자인 감독의 특별한 시선이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연희’라는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공간이 있긴 해도 너무 좁고 단조롭다. 강력한 발언에 비해 영화적 상상력은 빈곤했다.

굳이 새로운 것을 찾자면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이 고문실을 만들면서 공포를 극대화하도록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약간의 서스펜스가 가미됐다는 정도. 검사 역을 맡은 하정우의 연기가 걸출하지만 같은 시기에 개봉한 ‘신과 함께’에서 다시 그를 보는 것은 지루한 경험이다. 그나마 김윤식의 탁월한 연기로 인해 극영화의 맛을 알 수 있었다. 격문이 시(詩)가 될 수 없듯 영화는 무릇 예술의 문을 열어 보여야 다큐에서 벗어난다.

수용자들에게도 우려할 부분이 있다. 1987년에 있었던 일을 마치 역사의 봉인이 극적으로 해제된 양 상기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불과 30년 전의 시국을 “이제야 말할 수 있다”처럼 진지하게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7년에 자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훈장을 내보이거나 알리바이를 꾸미기에 바빴고, 갑작스레 참전용사가 나타나 다 아는 무용담을 쏟아냈다. 이런 방식은 촌스럽다.

물론 과거를 소환하는 영화의 역할을 안다.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있을 때 경각심을 일깨우고, 시대정신이 죽어 있을 때 풀무질을 해야 한다. 보수정권에서 억압받은 표현의 자유가 폭발한 측면도 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영화에 대한 신뢰는 높아졌고, 저널리즘이나 시민사회의 몫을 영화가 대신 해낸 측면도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신세를 많이 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영화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가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거나 훈도하려는 시도도 위험하다. 영화는 영화의 자리에서 영화의 문법과 미학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런 영화에 대해 관객은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 착한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봐주는 것은 영화인들에게 독이 든 술잔을 건네는 꼴이다. ‘1987’을 보고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면 ‘신과 함께’를 보고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영화와 관객의 건강한 관계라고 본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