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3시30분 경기도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남측 연락사무소. 23개월 만에 전화벨이 울렸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이 전화는 남북을 이어주는 직통 연락채널이지만 2016년 2월 개성공단 중단 이후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끊겼던 남북 관계 복원의 첫 단추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북한 선수단 참가, 남북 공동 입장, 단일팀 구성, 북한 예술단 공연 등 평화올림픽으로 무르익는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작은 소통이 평화의 기적으로 이어질 순간이자 나에겐 남북 관계 복원 과정에서 가장 설렌 장면이었다.
남북 간 끊겼던 말의 통로가 열린 후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현송월 단장이 강릉과 서울을 방문했다. 우리 점검단은 마식령스키장과 갈마비행장을 다녀왔다. 단일팀이 결정된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충북 진천의 선수촌에 입소해 우리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지난주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올림픽이 열리는 강릉과 평창 정선 지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평창에서 만난 김주호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은 “유럽 몇 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불안해 못 온다고 해서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북한이 참가하게 돼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출전 여부를 고민하던 유럽 선수 상당수가 북한의 참여로 평창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촉즉발 내전의 위기에서 최소한 올림픽 기간 중에 전쟁은 안 나겠지 하는 보증수표가 생긴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평창올림픽은 92개국 2925명이 참가해 동계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지게 된다. 미국과 영국은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한다. 한반도 정세 불안정이라는 대외적인 환경에 국내적으로도 조기 대선 등으로 붐업이 되지 못했던 올림픽이 북한 참여를 계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은 열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사실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 선수단과 해외 취재진이 속속 들어오고 있고,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30일 한국을 찾는다.
최근 일련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북 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선수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소통 부족으로 젊은 세대가 등을 돌렸다. 그 틈을 파고들어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 ‘평양올림픽과 평화올림픽’ 설전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평창올림픽은 기필코 평화올림픽이어야 한다. 세계인의 화합과 인류 평화를 내건 올림픽 정신을 제쳐놓고 여야가 올림픽을 제각기 이용하는 모양새여서는 안 된다. 북한 역시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을 핵 선전의 장으로 활용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무려 3번의 도전 끝에 평창올림픽을 유치했고 10년을 준비했다. 이제는 정치권의 반목과 갈라진 여론을 딛고 올림픽 성공에 모두 힘을 모을 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대한민국 위상이 한 단계 올라섰듯 평창올림픽을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02년 온 국민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서울 광화문광장 등에 모였던 그 여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일월드컵 때 네 살이던 딸은 당시 한마음으로 외쳤던 “오 필승 코리아”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오 피스 코리아”라고 말하곤 했다. ‘오 피스(peace·평화) 코리아’로 해석해보면 ‘오 필승 코리아’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16년 후 평창올림픽이야말로 남북이 하나 되는 진짜 ‘오 피스 코리아’가 아닌가.
그때 그 아이는 올해 스무 살이 됐다. 부모를 따라 광장에 나왔던 꼬마들이 어느새 평창올림픽 선수단의 주역이자 우리사회의 기둥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더욱 평창올림픽이 미래세대에게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는 행사로 치러지길 바란다. 올림픽경기장 주변에서 월드컵 때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오 피스 코리아’라는 음악이 울려 퍼지길 기대해본다.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
[돋을새김-한승주] 오! 피스 코리아
입력 2018-01-29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