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는 부산의 관문이다. 경부선의 종착점이자 출발지인 부산역이 자리 잡고 있고, 세계적 해양도시를 표방하는 국제여객터미널도 들어서 있다. 부산 사람들이 이 지역을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보물창고’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876년 부산항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밀려들기 시작한 데 이어 구한말,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동구는 부산의 살아 숨 쉬는 역사책이 됐다. 역사책의 한가운데 한 교회가 등장한다. 바로 초량교회(김대훈 목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는 최근 초량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3호로 지정했다.
‘최초’ 이야기 간직한 한강 이남 첫 교회
지난 24일 번잡한 부산역광장을 등지고 길 하나를 건너자 초량동의 고즈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 건축물로 지어진 부산역과 180도 다른 부산 동구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길 이름은 초량이바구길. 약 1.5㎞ 구간에 펼쳐진 초량동의 옛이야기엔 곳곳마다 ‘최초’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부산 최초의 근대 병원인 백제병원, 부산 최초의 창고였던 남선창고 터. 한강 이남 최초 교회로 알려진 초량교회도 그중 하나다.
벽돌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초량초등학교 옆길로 시선을 돌렸다. 빛바랜 붉은 벽돌이 하얀 십자가를 붙들고 서 있는 초량교회 예배당이 보였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세운 부산 최초의 교회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9월 미국 공사(公使) 호레이스 알렌 박사의 도움으로 당시 일본인 거류지였던 영서현(영선현)에 대지를 구입하고 이듬해 4월 미완성 선교사택(Omnibus house)을 세워 입주했다. 이곳을 사랑방 삼아 기독교와 일반교양, 한문 교육을 병행했다. 또 학생, 주민, 항구 선원을 대상으로 전도해 예배를 드리면서 1892년 11월 영서현교회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예배당 2층 한편에 마련된 역사관엔 100년을 훌쩍 넘긴 교회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베어드 선교사를 비롯해 제임스 매카이, 앤드루 애덤슨 선교사 등이 이끌어 온 선교사 목회시대, 1912년 제1대 한득룡 목사로 시작되는 한국인 목회시대, 1993년 교회 설립 100주년 이후로 이어지는 현대사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역사관 입구에서 기자를 맞은 곽원섭(70·초량교회 역사위원) 장로는 “영서현교회 영주동교회 초량삼일교회를 거쳐 초량교회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 모(母)교회 역할을 감당해 온 것이 ‘초량’의 역사”라고 소개했다.
항일·독립 운동의 거점으로
초량교회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억압받던 민족을 위해 영남 일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920년 호주선교부로부터 초량동 부지를 매입해 지금 위치로 교회를 이전하면서부터다. 특히 무역회사로 위장해 상하이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했던 ‘백산상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도들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독립 운동을 펼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곽 장로는 1920년 작성된 ‘예배당 신축의연금 대장’을 보여주면서 “이 장부엔 2대 정덕생 목사님과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들의 이름과 헌금액수가 적혀 있다”며 “이는 초량교회의 항일정신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신뢰를 보여준 증거”라고 설명했다.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에게 피난처이자 위로의 공간이 돼 줬다.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목회자와 성도, 피난민들이 한데 모여 국란 극복을 위해 기도한 통회구국기도운동은 한국교회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다.
“전쟁통에 여관이 어데 있습니까. 그 당시 한상동 목사님이 유치원 마당에다가 텐트를 쳐가 거기서 구국기도운동을 한 기지요. 그때 같이 기도하셨던 은퇴 장로님께 듣기로는 한 달 넘게 했다 하시더라고요. 이제 여기서 밀리면 그대로 죽는 긴데 할 게 뭐가 있노. 하나님 앞에 살려 돌라꼬 그라는 기지요.”
365일 지역주민 보듬는 어머니 교회로
전쟁 후 초량동 일대가 빈민 밀집지역이 됐을 땐 교회가 주민들을 입히고 먹이며 사랑으로 끌어안았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는 성도들이 십시일반 쌀을 모아 위기 가정을 도왔고 열악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겐 무료 공부방을 내줬다.
내친김에 2004년부턴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을 설립해 지역과 이웃이 필요로 하는 분야를 찾아 복지사역을 펼치고 있다. ‘행복한 아침밥상’ ‘사랑의 도시락’ ‘소망노인대학’ ‘사랑의 홈스쿨’ 등 다양한 활동이 1년 365일 내내 이어진다.
역사관 중앙엔 교회의 2대부터 9대 목회자가 말씀을 전했던 낡은 강대상이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곽 장로는 “초량의 향수와 정신이 묻어 있는 강대상”이라며 평양신학교 졸업 후 첫 사역지로 이 교회에 부임한 3대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26년 1월 10일 첫 설교와 1931년 7월 5일 마지막 설교가 신명기의 십계명에 대한 말씀이셨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한 것처럼 ‘초량에서 풀을 뜯고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지키면 나중에 천국에서 나와 당신들이 만날 거다’ 그리 말씀하셨어요. 앞서 천국에 가 주 목사님 만난 선배들처럼 저희도 그리 잘 따라가면 초량의 다음세대들한테 좋은 이바구가 안 전해지겠습니꺼.”
■김대훈 담임목사 "초량교회는 과수원 속 묘목 아닌 古木"
126년 된 초량교회의 11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20년째. 지난 24일 교회 목양실에서 만난 김대훈(55)목사는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배어있었다. 김 목사는 "이 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낸 4년을 밑천 삼아 그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다 보니 하나님께서 다듬고 또 다듬어 주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설립 100년이 넘은 전통교회 강단에 서게 된 당시 36세의 젊은 목회자가 믿을 건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었다. 목표는 한 가지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고백이 성도들 안에 충만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초량교회를 '고목(古木)'에 비유했다. 풍성한 열매가 열리는 과수원 속 묘목이 아니라 여러 해 자라 더 크지도 않고 곧 쓰러질 것 같은데 한 해 지나고 나면 늘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가 곧 초량교회가 보여준 모습이라는 것이다.
"초량은 부산을 상징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부산역이 있는 것만 봐도 알지요. 그런데 주거단지가 외곽으로 나가고 지역은 노령화되면서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비관적일 수 있지만 그게 곧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위한 바탕이었습니다."
김 목사가 소개한 초량교회의 영구 표어를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부산=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초기 기독교 선교 역사 가득한 ‘이바구의 보물창고’
입력 2018-01-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