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건축법 비껴간 중소병원… 안전 무법지대

입력 2018-01-29 05:00
지난 26일 189명의 사상자를 낸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현장에서 28일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방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하고 있다. 밀양=최현규 기자
300병상 미만 중소병원 전국에 1399곳… 실태 보니

커튼·매트리스 등 병원 물품
방염처리 의무화 대상 아니고
바닥면적 1000㎡ 미만으로
스프링클러 설치도 피해 가
전문가들 “피난 약자들 많아
소규모라고 예외 규정 안돼”

경남 밀양 세종병원 참사는 화재에 취약한 중소병원의 실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커튼·매트리스처럼 불이 붙으면 유독가스를 뿜어내는 병원 물품의 방염처리를 의무화한 법은 없었고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대형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나왔던 ‘땜질대책’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예고된 재해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28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세종병원 화재 사망자 대부분은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장재와 매트리스 등이 타면서 뿜어낸 유독가스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현행법상 세종병원은 방염 내장재나 방염처리된 물품을 사용할 의무가 없다. 종합병원의 경우 방염 성능이 있는 내장재를 사용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세종병원은 일반병원이라 적용 대상이 아니다. 다중이용업소법은 불특정 다수가 자주 이용하는 시설을 따로 정해 실내 장식물에 방염처리를 하도록 했지만 병원은 여기서도 빠졌다. 고시원, 노래방 등 화재가 잦았던 곳 위주로 강화된 법이기 때문이다.

세종병원은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에서도 자유로웠다. ‘화재 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지하이거나 창이 없는 층 또는 층수가 4층 이상인 층이면서 바닥 면적이 1000㎡인 곳에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세종병원의 바닥 면적은 224㎡에 불과했다.

전국에 300병상 미만인 중소병원은 1399곳(지난해 7월 기준)이고 이 중 세종병원처럼 100병상 미만의 소형병원은 857곳이다. 서울 등 수도권과 주요 도시 병원은 대형 건물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대부분 스프링클러를 갖추고 있지만 시골 병원은 그렇지 못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5층 이하인 의료기관이 많은 지방에는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라고 추정했다.

정부는 의료기관 평가인증제도를 통해 병원이 자발적으로 화재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대피요령과 소방설비 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등 기준을 충족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 입장에선 홍보효과 외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중소병원은 인증받을 여력이 없어 참여율도 저조하다. 지난 25일 기준 인증을 받은 의료기관 1723곳 중 100병상 미만의 소규모 병원은 117곳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규모·면적보다 시설의 사용목적과 재실자 상태 등을 고려한 안전기준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똑같은 환자, 약자들이 머무르는 시설인데 중소병원은 소규모이기 때문에 소방 피난시설에 관한 규정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의료시설이 들어서 있는 건물에는 전 층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대형 재난을 겪고도 당장 필요한 부분만 땜질식으로 해결하다보니 근본적인 안전기준을 세우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방재안전학회 등의 전문가들은 수년 전부터 “현대 건축물 대다수가 인화성이 높은 자재로 지어진다”며 “집합건물 등은 층수 상관없이 스프링클러를 의무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임주언 최예슬 기자 eon@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