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藝術)
인생은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상상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조금씩 완벽에 가깝게 창작하는 수련이다.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존재하지만, 조각만큼 간결한 것이 또 있을까. 조각은 원석을 쪼아내든, 석고를 붙이든, 혹은 그 위에 청동 처리를 하든, 궁극적인 목적은 더 이상 덜어낼 게 없는 ‘최소의 완벽’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부질없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시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괴물 앞에서 금방 사라지는 거품과 같다. 우주가 빅뱅으로 생성된 138억년 전이나,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5분 전이나, 지금 이 순간의 시점에서 보면 ‘찰나’일 뿐이다.
매정하게 흘러가버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인지한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고 그 기술을 ‘예술’이라고 불렀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을 고대 그리스어로 ‘테크네’라고 불렀다. ‘테크네’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의미가 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솜씨’다. 이 솜씨는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 터득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적인 경지다. 예술은 남들이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흔한 것들을 남다르게 보는 것이다. 그 진부한 것들을 통해 이상하면서도 새롭고, 그리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등장하는 문장을 보면 된다. “의사는 자신에게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돼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 간호사, 그리고 다른 외적인 상황에도 잘 대처해야한다.”
그가 말한 테크네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건의 본질과 순서를 직감하면서 집중하는 ‘몰입’을 뜻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문장은 “(의학이라는) 예술을 완벽하게 연마하기엔 인생이란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라는 자조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로마인들은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을 다음과 같은 라틴어로 표현했다. ‘비타 브레비스 아르스 롱가.’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의 원래 의미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만물을 정렬시키다’이다. ‘아르스’는 인도인과 유럽인이 정착생활을 하고 문명을 구축하던 시절의 핵심이자 씨앗이었다. 서양 문명은 바로 ‘아르스’가 발아해 만개한 결과다. 로마인들은 ‘예술’이란 개념을 정치 경제 건축 음악 종교 등 제국 건설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했고, 그 안에서 최선의 원칙을 발견했다. 인간 문명은 이 원칙이 작동해 다양한 모양이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간결(簡潔)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그림이든 조각이든 자신이 창작한 예술 작품을 완성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몰입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보내는 감성의 분출이었다. 그에게 조각은 자신이 관찰하고자 하는 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예술표현의 유전자인 몰입과 즉흥성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순간을 ‘조각’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할 뿐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처럼, 자신을 태초의 순간으로 몰고 들어갔다. 표현하려는 대상을 관조하며 그 대상이 그에게 다시 전달하는 상징을, 그 순간의 감각(感覺)을 표현했다.
여기서 상징이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침묵의 소리’다. 이 소리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들은 ‘내면의 소리(inner voice)’이며,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들은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다.
그는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했다. 조각가로서 자신이 표현하려는 대상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고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런 시도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려 한 지적인 분투였다.
인류는 오랫동안 1인칭이 아닌 3인칭에 매달렸다. 신을 추종한 사람들은 독립적이면서 배타적인, ‘이론’과 ‘교리’라는 정교한 체계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종교 창시자들이 추구한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존재를 객관적인 3인칭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신들의 편견과 아집에 우주와 인생의 원칙들을 강제로 편입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인류는 르네상스 시대가 돼서야 이런 사상적인 폭력과 굴욕에서 벗어났다. 인류는 자신이 아닌 3인칭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발명하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깨달았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1인칭밖에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사실은 자신의 생각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코기도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근대의 인간은 이 매력적인 문장을 통해 인간을 다시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 이젠 3인칭엔 관심 없는 1인칭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다. 여기서 신이란 바로 3인칭이다. 1인칭은 3인칭과는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1인칭 안에 있는 마음의 다양한 결들을 분석했다. 근대인들은 신이 앉았던 왕좌에 앉게 됐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1인칭이 2인칭이나 3인칭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1인칭은 2인칭과 3인칭과의 ‘관계(關係)’에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개체다.
“나는 나다”
1인칭과 3인칭의 관계가 하나가 되는 황홀경의 상태가 있다. 출애굽기 3장에 등장한다. 이 내용은 근대를 시작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보다 더 현대적이다. 모세는 삶의 길을 명문화해 제시한 상징적이며 문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살인을 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 40년간 사막에서 목동으로 살았다. 40년은 그를 자연인 모세에서 승화된 인간 모세로 만들었다. 모세는 유일무이한 임무를 깨달았다.
그는 어느 날 ‘광야 뒤편’으로 들어갔다. 이 표현은 그가 영적으로 대단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신의 계시가 있는 공간인 ‘광야’를 넘어서, 그 뒤편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곳은 어떤 인간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이 있는 장소다. 여기서 ‘하나님의 산’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표현 ‘하르 엘로힘’은 ‘그 누구도 들어간 적이 없는 가장 높은 산’이란 의미다. 모세는 그곳에서 불이 붙었지만 연소되지 않는 나무를 발견한다. 그가 다가가자,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지 오지 말라. 네가 서있는 장소는 거룩한 땅이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번역은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해주지 못한다. 이 문장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 “에흐에 아쉘 에흐에”의 의미는 “나는 나다”이다.
자기재현(自己再現)
자코메티가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에 인간은 ‘모사(模寫)’라는 표현의 장르를 카메라에 넘겨주었다. 자코메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사용한 ‘미메시스’ 개념을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행위에 대한 재현’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행위’란 표현하려는 대상의 심층에 숨겨진 기호(記號)를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표현하려는 노력이다.
자코메티는 최악의 비극의 현장을 유럽에서 목격했다. 인류는 더 이상 절대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과학 예술 철학을 통해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극은 이 같은 오만이 낳은 자식이었다.
자코메티는 20세기 초 유럽 한복판에서 인류 최악의 비극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목도했다. 그는 공포와 연민을 느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 재현의 가장 큰 특징을 ‘스푸다이오스(spoudaios)’라는 고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다. ‘스푸다이오스’란 한없이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 뜻한다.
이 단어를 번역하자면 ‘심각(深刻)’이라고 할 수 있다. 자코메티는 영혼의 가장 완벽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深)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조각(刻)한 것이다. 인류에게 그는 ‘자기재현’이 무엇인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줬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조각해야할 가장 간결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나는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고 있는가?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내가 조각할 가장 간결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입력 2018-01-25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