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WTO 제소 배경
ITC 권고안보다 강력
삼성·LG, 관세 폭탄 떠안아
태양광업계도 타격 불가피
WTO 결론 2년 넘게 걸리고
승소해도 강제 사항 없어
수출 하락 등 피해 눈덩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2일(현지시간) 결정한 세탁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는 미 무역위원회(ITC)가 권고한 안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최종 결정권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자국 기업 보호 의지가 노골적으로 담겼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이를 제소할 방침이지만 승소하더라도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어서 한국 기업의 피해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USTR은 수입산 세탁기의 저율관세할당량(TRQ) 기준을 120만대로 정하고 세이프가드 발동 첫해 TRQ를 초과하는 분량에 관세 50%를 부과하기로 했다. 120만대 이하의 경우도 20% 관세를 적용한다. ITC 권고안 가운데 120만대 이하에 대해 무관세 적용과 20% 관세 적용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USTR은 더 강력한 조치를 선택했다.
특히 USTR은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하는 제품도 세이프가드 대상에 포함했다. ITC는 “한국 등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제품은 심각한 자국의 산업 피해나 위협 원인이 아닌 만큼 세이프가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번 세이프가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천명해온 자국 우선주의를 실천에 옮기는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3일 민관 합동 대책회의에서 “미국은 국제규범보다 국내 정치적 고려를 우선시한 조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WTO에서 이 문제가 다뤄지면 승소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김 본부장은 “2002년 철강 세이프가드, 2013년 세탁기 반덤핑 관세, 2014년 유정용 강관 반덤핑 관세 등 미국의 과도한 조치를 제소해 여러 차례 승소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승소하더라도 실익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WTO에서 승소하기 어려울 뿐더러 승소하더라도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라며 “더구나 WTO가 결론을 내리는 데 최소 2∼3년 걸린다는 점에서 기업 피해는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업체들은 피해가 불가피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에 수출하는 세탁기는 연 300만대로 미국 시장의 40%를 차지한다.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의 세이프가드 결정은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시장에 손실을 입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LG전자는 연간 대(對)미국 세탁기 수출액이 10억 달러(1조702억원 추산)에 이르는 만큼 미국 현지 생산 등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방침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 12일부터 생산을 시작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가전공장에서 연간 100만여대의 세탁기를 생산해 공급할 계획”이라고 했고, LG전자도 “내년 2월 가동 예정이던 테네시주 클락스빌 세탁기 공장의 가동 시기를 올해 4분기로 앞당겨 현지 물량 공급에 차질이 없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장 가동이 늦은 LG전자는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미국 공장이 가동돼 그나마 대체 여력이 있지만 LG전자는 관세를 피할 방법이 아직 없다”고 설명했다. 두 회사는 세탁기 부품 제재에도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현지 협력사와의 계약 등 준비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고강도 무역제재를 가해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USTR은 한국 중국 멕시코 등에서 수입한 태양광 제품(2.5기가와트 초과)에 대해서도 30%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2년차에는 25%, 3년차에는 20%, 4년차에는 15%의 관세를 각각 적용한다. 미국에 태양광전지를 수출하는 국내 기업은 한화큐셀과 LG전자, 현대그린에너지 등으로 2016년 12억 달러(약 1조2860억원)어치를 수출했다.
이에 따라 태양광업계도 미국 정부의 세이프가드 발동에 따른 피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업계에선 이번 조치로 첫해에만 30%의 관세가 부과돼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이번 조치로 미국 내 셀 및 모듈 가격이 상승해 태양광 시장 규모가 10∼30% 축소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경우 대미 수출이 줄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번 세이프가드 조치 이후가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에 수출하지 못하고 남은 물량도 문제가 될 것”이라며 “공급 과잉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에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등 다른 산업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박사는 “미국의 통상법은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자기 입맛에 맞춰 갖다 댈 것”이라며 “반도체는 미국이 덤핑으로 걸 수 없고 소재 부품이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은 유럽 일본 등으로의 수출시장 다변화를 통해 피해를 줄일 생각이다. 한화큐셀 관계자는 “미국 내에선 가격 요인 이외 다른 부분에서 비교우위를 확대하고 선진국 및 신흥국으로 공급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서윤경 김현길 오주환 기자 y27k@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美 세이프가드 발동] 최악 선택지 뽑아든 트럼프… 삼성·LG 비상
입력 2018-01-24 05:00 수정 2018-01-24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