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헌법 정신 훼손한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

입력 2018-01-22 18:39
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공개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법원의 인사·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법원행정처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 판사들의 동향과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심지어 법원행정처는 평소 대법원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온라인 게시글을 조사하고 정치적 성향을 보수·진보, 온건·강성으로 나눠 관리했다. 조사위는 판사들의 동향을 조사한 문건이 실제로 실행됐는지를 확인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사법부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으로 재판부 독립이라는 대원칙을 법원이 스스로 훼손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법원행정처가 2016년 청와대의 요청을 받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선고 전 항소심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해 보고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선고 후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재판 결과에 불만을 표시하자 법원행정처는 앞으로 상고심을 어떻게 진행할지 대책을 마련했다. 사법부 내부 조직인 추가조사위가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과 재판의 공정성 훼손을 스스로 걱정했을 정도다. 이는 대법원이 대통령의 관심사를 심리하는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하고 상급심 진행 방식을 상의했다는 뜻인데,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훼손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2009년 사법파동을 불렀던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에 못지않은 심각한 일이다.

지금 국민들의 사법부 불신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103조가 예외 없이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민들은 수십년째 변호사를 선임할 때 판사의 출신 학교와 사법연수원 기수, 퇴임 직전 보직과 근무지를 먼저 챙기는데 법원은 지금도 전관예우가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원론적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일반인의 법 감정과 전혀 다른 판결 때문에 법조계의 제 식구 감싸기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판사들이 승진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윗선의 뜻에 따라 판단했을지 모른다는 의심까지 생긴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번 조사 결과를 현재 진행 중인 사법개혁에 충실히 반영해야 할 것이다. 조사위가 확인하지 못한 실행 여부와 누가 어떤 방법으로 실행 과정에 관여했는지를 파악해 헌법이 보장한 법관 독립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원행정처의 업무 영역과 방식을 다시 검토해 전면적인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특권에 기초한 엘리트주의와 고압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감추고 적당히 덮고 넘어가서는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