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3> 최정송 권사

입력 2018-01-20 00:01
최정송 권사
최정송 권사(왼쪽)가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 독일인 하티히 목사 부부와 함께했다. 최정송 권사 제공
1978년 독일 오버하우젠에 있는 병원 동료들과 포즈를 취한 최 권사(앞줄 왼쪽 두 번째). 최정송 권사 제공
라이프치히 한인교회 전경. 최정송 권사 제공
박경란 칼럼니스트
겨자씨 같은 작은 기도회로 동서독 통일의 초석을 이뤄낸 독일 라이프치히 월요기도회. 오직 촛불과 기도로 피 흘림 없이 철의 장벽을 허물어내고 평화로운 통일을 만들었다.

성니콜라이교회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가 인도한 평화기도회에는 동양에서 온 파독 간호사 최정송(76) 권사도 두 손을 모았다. 1989년 당시 라이프치히에서 살던 그는 매주 월요일이면 니콜라이교회로 향했다. 결국 평화기도회의 호흡은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의 소박한 염원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거대한 파도를 이루었다.

“10월 9일, 그날이 생생해요. 7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지요. 결국 이 시위는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됐어요.”

지금도 성니콜라이교회는 실업자, 난민 등을 테마로 정기적인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최 권사 가족은 하르츠산맥 인근 도시 고슬라에서 살다 장벽이 무너지던 해인 89년 5월 동독지역인 라이프치히로 이사했다.

당시 무역회사에 다니며 전시회 참여를 위해 종종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던 남편이 이곳으로 이주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 권사는 썩 내키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고 동료들도 동독 지역으로 가는 걸 만류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공산국가였던 곳으로 이주하는 데는 큰 결단이 필요하던 때였다.

“분단 상태인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쉽지 않았지만, 북한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상적으로 문제가 될 게 없어 가능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무엇보다 발걸음마다 앞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어요.”

그는 72년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남편 김기숙 집사가 1년 전 이미 파독 광부로 독일에 와 있었다. 홀로 아들 셋을 키우며 고국에서 살던 최 권사는 “부부가 같이 살아야 한다”는 시아버지의 권유로 간호교육을 받고 남편의 뒤를 이어 독일로 오게 된다.

“3년 동안 아이 셋을 시부모님께 맡겨두었어요. 한창 부모 손이 필요한 때인데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지요.”

그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병원에서 밤 근무와 초과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3년 후 어느 정도 안정되자 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당시 친분이 있던 독일인 하티히 목사의 도움으로 중학생이던 큰아들을 포함해 세 아이가 곧바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티히 목사는 최 권사 가정이 독일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육적, 영적으로 잘 이끌어주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몰랐던 그는 가난한 이방인을 향한 도움에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독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후 하노버 한인교회를 동시에 섬기게 되면서 성경말씀이 삶의 이정표가 됐고, 예수님이 진정한 구원자임을 눈물로 시인했다. 이후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는 그의 고백 찬양이 됐다.

라이프치히로 이주한 후 한인 레스토랑 ‘Kim’을 운영했다. 89년 내부수리가 한창일 때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됐다.

라이프치히에서 통독 후 최초로 민영화된 레스토랑으로 불리며 유명해졌다. 최고급 한식과 일식으로 메뉴를 고급화했다.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유수 정치인들이 거쳐 가는 코스가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시절 다녀갔다.

사업이 확장될수록 그는 이웃 사랑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했다. 매 주일이면 레스토랑 문을 닫고 예배를 드린 후, 노숙인과 고아원 아이 등 소외계층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그러던 중 복음 전파의 거점이 될 한인교회 공동체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당시 통일이 되면서 음악의 도시 라이프치히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들이 많았다. 다행히 퓌러 목사의 배려로 성니콜라이교회의 교육관에서 한인예배를 14년 동안 진행할 수 있었다. 퓌러 목사는 평화의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마지막 분단국가인 남북한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 2014년 소천하기까지 인간을 우상화하고 기독교 탄압이 심한 북한의 복음화를 간절히 소망했다.

점점 한인 교인 수가 늘어가자 성도들과 함께 성전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2000년 권순태 목사가 부임하면서 연약한 공동체에 부흥이 일어났다. 온 성도가 기도하며 50군데 이상의 건물을 물색하던 중, 하나님은 건평 2000평의 5층 건물을 보게 하셨다. 하지만 은행 융자의 어려움이 있었다.

최 권사는 기도로 무장하고 작센주 교구청을 찾아가 부탁했고, 교구청에서 보증을 서주기로 하면서 겨우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후 목사님을 비롯해 온 성도가 몸을 아끼지 않고 성전 수리에 동참했고 마침내 2008년 헌당예배를 드렸다.

현재 이 건물 안에는 한인 식품점과 라이프치히 한인회, 한글학교 등 한인사회 공동체가 함께한다. 건물 내 숙소를 마련해 방이 없는 한인 학생들을 위해 저렴하게 임대하며 복음 전파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라이프치히 한인 동포들을 십자가에 달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넓게 벌린 팔 안으로 한데 모으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교회를 향한 최 권사의 눈물과 땀으로 점철된 씨 뿌림의 헌신이 스며있다.

“늙어가면서 이제야 철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지나온 삶을 생각나게 하고 늘 회개하게 하시네요. 이 모든 일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힘들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고 교회 문지기를 자처하며 봉사하는 그. “서로 남의 짐을 져주었을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될 것”이라는 퓌러 목사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박경란<재독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