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미투캠페인 이후 예술계

입력 2018-01-18 17:29 수정 2018-01-18 21:23

비제의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다. 1875년 초연된 이 작품은 군인 돈 호세와 집시 출신 여공 카르멘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뤘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미모에 반해 상관을 죽이고 탈영해 밀수조직에 가담하지만, 카르멘이 투우사 에스카미요를 만난 뒤 변심하자 질투에 사로잡혀 카르멘을 죽이고 만다. 카르멘은 초연 이후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한 뒤 파괴시키는 ‘팜므파탈’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르멘을 단순히 나쁜 여자로 보던 데서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보는 해석이 많아지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호세가 여자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친 피해자였다는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7일 이탈리아 피렌체 마지오 피오렌티노 극장에서 개막해 18일 막을 내린 오페라 ‘카르멘’이 원작과 다른 결말로 유럽 공연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남성 연출가 레오 무스카토는 카르멘이 맨 마지막에 자신을 죽이려는 돈 호세의 총을 빼앗아 돈 호세를 죽이는 것으로 끝냈다. 원작에서 돈 호세가 마음이 떠난 카르멘을 위협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는 데 비해 무스카토는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중요하게 처리했다.

사실 오페라계는 1980년대 이후 연출가의 독자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흐름의 효시로 꼽히는 것은 82년 조너선 밀러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연출한 ‘리골레토’다. 원작의 배경인 중세 시대 만토바 궁정을 1950년대 뉴욕 마피아들의 술집으로 바꿨다. 원작의 배경을 다양하게 바꾸는 등 현대적인 감성을 불어넣은 이런 오페라들이 요즘 관객들에게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오페라 ‘카르멘’도 원작의 배경인 18세기 스페인 안달루시아가 20세기 중반의 미국이나 쿠바로도 바뀌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을 조르던 칼이나 총을 사용하던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다는 결말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무스카토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연출한 ‘카르멘’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무스카토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유럽 언론이 무스카토의 ‘카르멘’을 앞다퉈 보도하며 인용한 이탈리아 국립 통계기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이탈리아의 16∼70세 여성 3명 중 1명은 육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에는 149명의 이탈리아 여성이 전 현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했다.

개막과 동시에 뜨거운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은 6회 공연 내내 매진을 기록하는 한편 팬과 평론가 사이에서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반대하는 측에선 원작을 훼손했다는 의견이 많다. 찬성하는 측은 시대에 따라 오페라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현대 여성의 입장에서 ‘카르멘’은 데이트 폭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난해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서 비롯된 성범죄 고발 운동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은 미국을 넘어 현재 유럽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는 과거에 훌륭한 예술가로 칭송받거나 걸작으로 여겨졌던 작품이 오늘날의 관점에선 문제투성이인 경우가 적지 않아서 재평가 움직임이 강하다. 지난해 영국에서 전시를 앞두고 보이콧 움직임이 거셌던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이 대표적이다. 고갱이 매독에 걸린 채 타히티에서 14세를 비롯해 여러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하고 아이를 낳게 한 뒤 버렸던 전력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거센 물결 속에서 현대 예술계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동안 뛰어난 예술가로 인정받았던 누군가가 성범죄를 저질렀던 것이 드러났을 때 예술가 자신과 그의 작품을 어떻게 봐야할지 숙제를 안게 됐기 때문이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