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순회목회 나선 아버지의 자전거, 동요가 되다

입력 2018-01-20 00:00
고흥반도 중심교회 고흥읍교회 석조예배당. 해방 후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지붕 끝 비둘기(오른쪽 하단)가 인상적이다. 목치숙 목사는 이 교회에서 사역하고 아들 일신은 부설 유치원에 다녔다.
목일신이 전주 신흥학교 재학 시절 잡지 '어린이'에 투고한 작품과 자신의 얼굴 사진(위). 목일신은 1960∼80년대 경기도 부천시에 살았다. 부천중앙공원 내 목일신 노래비(아래).
고흥동초교 운동장에 마련된 목일신 노래비. 고흥군은 매년 '목일신 동요제'를 연다(위). 고흥읍교회 뒤편 어린이공원 내 타일 작품. 고흥동초교 등 고흥 관내 어린이 작품이다(아래).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오불랑 꼬불랑 고개를 넘어/비탈길을 스스륵 지나갑니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울 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머나먼 시골길을 돌아오실제/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동요 '자전거' 1932년 '아이생활'>

목일신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전남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교) 5학년 때 이 어린이는 '자전거'라는 동요 가사를 작사했다. 그리고 1932년 기독교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했다. 전 국민 애창동요 '자전거'는 이렇게 창작됐다. 소년은 훗날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는다. 두산백과의 짧은 기록은 이렇다. "한국의 아동문학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아일보에 동시 '산시내'를 발표하였고 30여년 동안 교직에 종사하면서 많은 동요를 지었다. 대표작으로는 '누가 누가 잠자나' '자전거' 등이 있다."

아동문학가 목일신의 작품 중 우리 머릿속에 남는 또 한 곡의 동요는 '누가 누가 잠자나'이다.

넓고 넓은 밤하늘엔/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나라 아기별이/ 깜박깜박 잠자지

깊고 깊은 숲 속에선/ 누가 누가 잠자나/ 산새 들새 모여 앉아 / 꼬박꼬박 잠자지 <1965년 교과서>

목일신은 근대 어린이음악과 근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다. 일신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뿌리는 기독교 신앙이다. 그런데 그와 그의 아버지인 독립운동가 목치숙 목사에 대해 연구된 것은 전무하다. 교회는 관련 기록물을 남기지 못했고, 신학대학 등 관련 기관은 연구에 소홀했다.

근·현대 한국사회를 움직인 수많은 인재들이 기독교인이다. 마땅히 신앙의 모범으로 받들거나 공과를 평가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크리스천 인물을 탐사하며 느끼는 소회는 한국교회가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다는 것이다. 교권에는 민감하면서 선대의 유업은 등한시한다. 목치숙 목일신 부자의 삶을 좇는 과정에서도 그런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한국교회가 각종 교과서에서 기독교를 홀대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원사료가 부족한데 교과서 필진이 어떻게 반영한단 말인가.

순회목회를 위한 아버지의 ‘자전거’

부자를 통해 본 복음의 경로는 기독교가 근대 한국사회의 변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전남 고흥군은 여수 오른쪽 고흥반도 지역으로, 한마디로 외진 곳이다. 1894년 3월 미국 선교사 레이놀즈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호남선교를 위한 답사에 나선다. 인천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군산항에 도착해 육로로 이동했다. 전주 김제 고창 영광 무안 목포. 그리고 목포에서 다시 배편을 이용해 진도 완도 거금도(현 고흥군) 흥양(현 고흥읍)에 이르렀다. 여기서 육로로 낙안 순천 여수까지 갔다.

고흥에 도착한 선교사 일행은 ‘양반촌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답사일기를 남겼다. 향토사학자들은 그 양반촌이 당시 고흥 세력가이자 고흥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신우구(1854∼1927·독립운동가)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2차 답사는 1897년 전남 해안을 중심으로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에 의해 이뤄졌다. 레이놀즈, 드루, 오웬 등이 의·약학 전공자들이었으므로 한의사 신씨 가문과 호흡이 맞아 의료선교를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답사 경로 중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은 호남선교의 거점이 됐다.

선각자 신우구는 목치숙 등 6명과 함께 자신의 한약방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현 고흥읍교회의 시작이었다. 신우구의 며느리는 독일 출신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1880∼1934) 선교사의 양녀 곽애례이다. 곽애례는 어머니 서 선교사의 뜻을 이어 전남 남동부해안 선교에 전력했다. 1930년대 화가 천경자가 고흥읍교회 유치원에 다녔다.

목일신은 아버지에 대해 배화여중 교사 시절 ‘배화’지(1974년)에 이렇게 밝혔다.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시던 아버지께서 돌연 학업을 중지하시고 내려오셨는데 까닭인즉 그때 기미년 3·1운동에 가담하시어 평양과 서울에서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부르고 오셨던 것이다. 또한 지방에서도 만세를 선동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3년형의 감옥 생활을 치르셨는데 출옥 후에도 어린 우리들에게 때때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애국의 정신을 고취하여 주셨던 것이다.…”

목치숙에 대한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기획하고 작성한 선언문에 조선혈족동맹태업이라고 쓰고 조선의 독립을 기하는 시위운동을 책동’(1919년 7월 25일)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1919년 4월 7일 고흥 장날 오석주(제헌 국회의원·목사) 등 예수교인과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 출옥 후 고흥YMCA 회장 등을 지내며 조선물산장려운동 등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목치숙은 보성읍교회, 고흥읍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목사 아버지에게 배운 동요쓰기

지난 주말 고흥동초등학교 교정. 1977년 제막된 ‘목일신 선생 노래비’가 교정 한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고급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 트랙을 동네 주민들이 돌고 있었다. 고흥문화예술회관 뜰에는 자전거 모양의 동요비가 있었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 박지성 이름을 딴 공설운동장과 거리 이름이 초라한 노래비를 무색케 한다.

앞서 찾은 경기도 부천중앙공원에는 ‘자전거’ 동요비, 부천 도당공원과 부천 범박동 한 아파트 단지 안에는 ‘누가 누가 잠자나’ 동요비가 목일신을 기렸다. 고흥군청 뒤 고흥읍교회에는 그가 다녔던 유치원이 지금도 운영된다. 교회 뒷산은 어린이공원이다.

목일신이 흥양보통학교를 다닐 때 일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목치숙은 아들에게 우리말로 글을 지으라고 가르쳤다.

2013년 ‘목일신 전집’(소명출판)을 쓴 이동순 교수(조선대)는 “당시 어린이동요 부르기가 활발하게 이뤄진 곳은 교회 주일학교였다”며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시절 목일신은 아버지가 사다 준 어린이잡지를 보고 동요 쓰기를 통한 한글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또 “그 무렵 민족적 울분을 표출할 길이 없었는데 기독교 계통 어린이잡지 창간이 잇따르면서 문사들은 우회적으로 우리의 정서를 동요로 풀어냈다”고 덧붙였다. 목치숙 목일신 연구는 이 교수의 책이 유일하다.

목일신 대표작 ‘자전거’는 자전거를 타고 순회목회에 나선 아버지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소년 목일신의 순수한 감성이 담겼다. 1912년 무렵 미국남장로회 순천선교부가 시작되면서 선교회 측이 순회 목회용 자전거를 목치숙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치자면 자동차 한 대 값이었다. 목일신은 “나는 시오리나 되는 보통학교를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와 지어 본 것이 동요 ‘자전거’다”라고 ‘배화’교지에 남겼다.

그러나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 목치숙은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소천했다. 동시 ‘우리 아버지’는 그때의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목일신은 순천 매산학교를 거쳐 전주 신흥학교로 전학한다. 순천과 전주선교부가 세운 대표적 미션스쿨이다.

한데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동조해 이듬해 1월 신흥학교에서도 시위가 벌어진다. 목일신은 이때 격문을 썼다. 격문을 등사한 유인물과 태극기를 든 학생들은 이내 일경에 체포됐고 36명이 즉결을 받고 전주형무소에 이감됐다. 결국 목일신은 퇴학당했다.

대를 이은 항일운동, 그리고 절필

그는 “감방 안에서 하루 한 장씩 주는 휴지를 아껴서 몇 편의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하늘’ ‘구름’ ‘꿈나라’ 등이었다. 목일신은 1930년대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 현상에 동요가 당선됐고 민요 ‘명사십리’ ‘뱃노래’ 등을 써 콜롬비아 레코드에 취입하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 간사이대학도 졸업했다.

하지만 일제가 전시동원 체제에 들어가자 절필했다. 부친의 뜻을 저버리고 반민족행위를 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때 이름 난 동요 작가들이 훼절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천재적 작가’로 불리던 계관을 버렸다. 순천여중을 시작으로 목포여중 이화여중 배화여중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일생을 보냈다. 운동을 잘했던 그는 1950년대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겨루었던 탁구선수 자매 위쌍숙·순자의 코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의 신앙적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아마도 부천에 거주하면서 소수 교파에 몰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고흥군은 목치숙 목일신을, 경기 부천시는 목일신을 연구한다. 고흥에는 목일신동요제, 부천엔 일신초·중학교가 있다. 목치숙 목사에게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19세기 말 선교사들의 전도여행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이 있었다. 그 물결들이 만나 강과 바다를 이뤘다. 그리고 한반도를 복음의 생수로 적셨다. 그 생수는 또 어디로 어떻게 축복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한국 근대 기독교의 ‘천로역정’ 속에 목치숙 목일신 부자가 있었다. 그들 옆에서 신우구 서서평 오석주 곽애례 천경자 이종호(독립운동가) 이기풍 김정복(순교자) 정규오(신학자) 등이 동시대를 살며 고락을 함께했다.

고흥 부천 전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