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고위급회담] 南 “비핵화” 꺼내자 北 “좋은 성과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입력 2018-01-09 23:12 수정 2018-01-09 23:31
남북 고위급 회담 북측 수석대표인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왼쪽 가운데)이 9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회담 전체회의에서 우리 측 대표단을 향해 기조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북측 대표단의 황충성 조평통 부장, 전종수 조평통 부위원장, 이 위원장, 원길우 체육성 부상, 이경식 민족올림픽조직위 위원, 남측 대표단의 김기홍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기획사무차장,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조명균 통일부 장관, 천해성 통일부 차관, 안문현 국무총리실 심의관. 판문점=사진공동취재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시종일관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던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은 우리 측의 ‘비핵화’ 언급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북한이 그동안 자신들의 핵·미사일 개발은 미국의 핵 위협에 맞선 자위적 조치임을 강변해온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예상됐던 상황이다.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핵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해 왔다.

이 위원장은 9일 밤 종결회의에서 비핵화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회담 분위기를 돌변시켰다. 그는 “남측 언론에서 북남 고위급 회담에서 그 무슨 비핵화 문제 가지고 회담이 진행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여론이 확산된다”며 “우리가 보유한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탄도로켓을 비롯한 최첨단 전략무기는 철두철미하게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문제를 북남 사이에 박아 넣고 또 여론을 흘리게 하고 불미스러운 처사를 빚어내나”며 “오늘 좋은 성과 마련했는데 이런 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고 좋지 않은 모양새를 가져올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이 위원장은 회담 종결회의가 끝나고 회담장을 빠져나가면서도 ‘남북 회담에서 비핵화는 전혀 의제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네”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기자들이 회담 총평을 요청하자 ‘회담은 잘됐는데 언론이 오도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는 또 비핵화에 대한 북측의 입장은 확고하냐는 질문에 “또 어떻게 오도를 하려고 (그러느냐)”고 불신을 드러낸 뒤 “후에 기회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남측의 비핵화 언급은 오전 열린 전체회의 기조발언 때 나왔다. 고위급 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조속한 시일 내에 한반도 비핵화 등 평화 정착을 위한 제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대화 재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남북대화의 흐름을 북핵 대화로 이어가자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부는 우리 측의 이 같은 기조발언에 대해 당초 북측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경청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북측이 비핵화 대화에도 호응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조 장관은 회담이 끝난 뒤 이 위원장이 예민하게 반응한 데 대해 “북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조금 더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언급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의 뒤늦은 불만 표출은 우리 측의 언론 보도를 접한 평양의 질책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이 위원장이 ‘언론 오도’를 직접 언급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판문점 회담장 상황은 남측엔 CCTV로 실시간 전달되고 평양엔 음성만 전송된다. 이날 발표된 남북 공동보도문에는 군사당국 회담 개최, 다양한 분야에서의 접촉 및 교류 협력 활성화가 담겼지만 북핵 관련 사안은 아예 빠졌다. 대신 ‘남북 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은 우리 민족이 당사자로서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북측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은 빠지라는 취지다.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적극적인 대화 공세로 돌아섰지만 비핵화 대화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 발사 후 ‘국가 핵 무력 완성’도 선언한 상태다.

권지혜 기자, 판문점=공동취재단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