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릴 듯 허약한 몸이다. 왜소한 어깨, 앙상한 팔과 다리…. 그럼에도 그는 걷는다. 그건 바로 나다. 회한과 미련의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다짐하는 나의 자화상이다.
20세기 최고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한국인에게 성찰의 메시지를 던진다. 국민일보 창간 30주년 기념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묵상의 방’. 이곳에서의 감동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며 새해를 여는 순례 코스가 되고 있다.
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미로처럼 이어진 자코메티 전시장의 마지막 코너 ‘묵상의 방’(일명 워킹맨 방)은 시공을 초월한 듯 영적인 기운이 감돈다. 오직 조명 2개에 의지한 캄캄한 방이다. 이곳에 자코메티의 상징 같은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1960)이 딱 한 점 있다.
작품을 올려놓은 팔각의 ‘제단’ 주위로 방석이 놓여 있다. 커튼을 밀치고 들어선 관람객들은 자석에 끌린 듯 자리에 앉고, 이내 상념에 젖어 오래도록 조각상을 바라본다. 실은 조각상이 거울처럼 비추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 오며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해가 바뀌었다. 다시 한 발을 내딛고자 한다. 걷기의 숙명을 타고난 우리 모두는 다시 그렇게 걷고자 한다. SNS에는 “특히 마지막 방에서 전율이 느껴졌다”며 자코메티전 관람을 권하는 글들이 연일 올라오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곳을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묵상의 방’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코메티 말기의 최고 걸작 ‘걸어가는 사람’은 조각 작품 경매 사상 두 번째로 가격이 높은 1158억원. 그 고가의 작품이 오롯이 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잣대로 이 방을 논해서는 안 된다. 작품은 원본을 캐스팅한 청동상이 아니라 석고 원본 그 자체다. 인간의 내장이 만져지는 듯 물질감이 공기를 타고 전달돼 저도 모르게 울컥해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힘은 걷는다는 행위가 주는 묵직한 감동일 것이다. 동물과 차별화되는 인간의 직립보행을 생각할 때, ‘걸어가는 사람’은 우리의 숙명을 시각화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풀 드루아(‘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저자)는 말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걷기가 인간이 되는 것이며, 걷고 생각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성찰의 길 위에 서 있게 된다.”
고단하고 남루한 삶에 대한 자코메티 식 위무의 손길도 있다. 그의 조각품은 매끈하지 않고, 세련미라곤 없다. 떼어내고 떼어내 더 이상 걷어낼 것 없이 남아 있는 표면의 울퉁불퉁함. 마치 상처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 같다. 역설적으로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를 받는다. 그래서인가. 그와 어울렸고 모델이 돼 주기도 했던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 장 주네는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러운 상처를 찾아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이는 곧 ‘뺄셈의 예술’이기도 하다. 스위스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조각가이자 화가 자코메티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미술사에 획을 긋는 조형을 탄생시킨다. 초현실주의 그룹과 결별하고 10여년의 모색기를 가졌던 그가 내놓은 인간의 형상은 점점 길어지고 철사처럼 가늘어졌다. 미증유의 전쟁, 인간 폭력성을 경험하며 만들어낸 이 볼품없고, 미라처럼 말라버린 인간상은 불안과 실존을 마주한 ‘현대인의 초상’으로 명명된다.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그 걷어내 비워진 공간이 만들어내는 아우라다. 주네가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치워 버릴 줄 아는 예술가”라고 했던 자코메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겸허하게 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오게 했다.
회화에서도 색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뺀다. 형상을 그릴 때는 쓱쓱 그은 몇 가지 선이 전부다. 색은 회색이나 갈색의 단색이다. 급히 그린 것 같지만 오히려 머리와 배경 사이를 오래도록 지우고 지우며 그려낸 형상들이다. 조각이든 회화든 그 비워진 공간, 지워낸 배경에서 더 많은 말을 하는 듯하다. 그 비워냄이 말을 건넨다. 그래서 한 작품에 오래도록 머물게 되는 전시다.
이는 곧 우리 시대가 자코메티를 소환하는 이유다. 아내 아네트를 모델로 작품화한 ‘앉아 있는 여인’을 보라. 볼품없는 몸을 하고 꿇어앉은 무릎 위에 다소곳이 손을 얹었다. 기도하는 듯한 자세에서 한없이 낮아져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간구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장모와 아내, 자녀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직장인 조영휘(47·경기도 군포)씨는 “지나온 내 시간의 궤적이 흘러가더라. 작품을 통해 나를 대면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작가가 죽음을 경험한 뒤 탄생시킨 조각이라는데, 전시를 보고 나니 삶의 에너지를 다시 얻는 것 같아 신기하다”고 말했다.
이번 특별전은 자코메티의 첫 한국전이다. 미술사적으로 인정받는 서양 조각가의 전시는 2010년 오귀스트 로댕 전 이후 처음이다. 미술시장에선 로댕보다 더 높은 작품 가격으로 평가받는 자코메티의 예술세계를 조각 회화 드로잉 등 말기의 걸작 120점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전시는 4월 15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묵상의 방’… 새해를 여는 순례 코스가 되다
입력 2018-01-09 20:06 수정 2018-01-09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