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DNA 되살리자] “인생은 불확실하고 불합리한 면 많아, 무서워 말고 한 발씩 나아가야”

입력 2018-01-03 05:00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혜남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17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손발이 조금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불행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도전은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현규 기자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요일별로 구별해 놓은 약통. 최현규 기자
“도전은 거창함보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절망한 채 누워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뀌어
어차피 살아가야 하니 행복하고 아름답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도전 아닐까요.”

파킨슨병을 17년간 앓으며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밌는 이유’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김혜남(59·여) 박사는 “사는 게 결국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창하게 목표를 세우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어느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며 “도전이란 현재에 충실히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김 박사와의 인터뷰는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진행됐다.

김 박사는 2001년 2월 신경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17년 동안 병마와 싸워오면서 7권의 책을 펴냈다. 지난해 8월에도 그림편지 형식의 책 ‘오늘을 산다는 것’을 출간했다. 지난해는 통증이 극심해져 여섯 번이나 입원하고 3시간마다 먹던 약을 1시간30분마다 먹어야 할 정도로 고통이 컸던 해였다. 통증이 시작되면 손이 굳어 움직임은 둔해졌고, 몸이 굽어 돌아눕는 것조차 혼자 할 수 없었다.

김 박사는 그러나 “24시간 내내 아픈 것은 아니었고, 덜 아픈 시간도 있었다”고 덤덤히 말했다. 약으로 통증이 누그러들면 스마트폰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이렇게 나온 책은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는 즐거움 등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감정을 따뜻하게 담아냈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휴대전화에 알람을 맞춰놓고 약을 먹으면 됐다”며 “아프지 않았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했다.

김 박사는 고교 3학년 때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외과 인턴 시절 환자를 치료하다 유산을 경험했다. 겨우 버텨내고 병원을 개업했지만 1년도 안 돼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의사로서 이 병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우울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울증 약을 먹을까 생각하며 한 달간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던 중 문득 깨달았다. ‘절망한 채 누워있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러고 있나.’

김 박사는 “현재가 불편해 활동을 못하면 거기 맞춰 일을 제한하면 된다”면서 “미래란 누구에게나 불확실한데 오지도 않은 미래를 끌어다 현재를 망치지 말자는 생각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다시 병원에 나갔다. 환자들을 진료하고 귀가해서는 집안일도 열심히 했다. 집필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그저 하루를 살아내고 다시 그 다음 날을 살아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 박사는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고,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면서도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어 “인생이란 어차피 불확실하고, 어떻게 보면 불합리한 면이 많다. 그런 걸 무서워하지 말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살아가면 어딘가 도달하게 된다”며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인생에 대한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병이 진행되면서 소중히 여기게 된 삶의 가치로 ‘관계’와 ‘경험’을 꼽았다. 그는 투병 중에 가족과 지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남편은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고,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딸의 병 수발을 했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아프면서 느꼈던 건 모든 경험이 가치 있다는 것”이라며 “병환 중에 책을 쓴 것도 주변사람들과 무언가라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써낸 책이 청춘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베스트셀러 작가, 20∼30대의 멘토라는 타이틀을 안겨줬다. 김 박사는 “살아온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책도 쓰고 멘토라 불리게 됐다”며 “그때그때 현재에 충실히 살아온 게 도전이 됐다”고 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를 위한 조언을 구하자 “할 말이 없고 미안하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 박사는 고교 시절 고려대 옆에 살았다. 학생들은 독재정권에 맞서 연일 시위를 벌였고 학교 주변은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다. 매캐한 가스로 눈물을 흘리고 다니는 날이 많았다.

김 박사는 “꿈을 키우는 청춘인데 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나, 화가 많이 났다”며 “그때 후대에는 이런 사회를 물려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불확실하고 혼란한 사회를 만들어줬다. 그게 참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젊은이들도 제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또 “2017년은 이 사회의 어른들이 무너져 신뢰를 잃어버린 혼란의 해였지만 변화를 위해 겪는 진통과 혼란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과정’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천명의 환자를 돌본 정신과 의사이자 파킨슨병 환자로서 아픈 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정신적·육체적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을 어떻게 다스리느냐’라고 했다. 그 역시 한밤중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었다. 김 박사는 “고통을 즐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며 “고통스러울 땐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이 가신 뒤의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해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좋은 것도 지나가고 나쁜 것도 지나가고, 모든 것은 지나가는데 그게 어디로 가는지는 내 발걸음에 달려있다’는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살아왔다. 김 박사는 “살아보니 시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시간을 어떻게 채색할 것인가’가 제게 가장 큰 미션”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최근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휴식을 취하니 ‘2도’ 각도로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책도 펴낼 예정이다. 김 박사는 “고통에 관한 책도 써보고 싶다”며 열의를 보였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