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남도영] 너무 오래된 보수의 레퍼토리

입력 2018-01-01 17:33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전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고, 이전 정권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가운데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잘못을 저질렀다. 의회는 경험 없는 범법자들로 가득 찼고, 경제는 난장판이 됐으며, 인구는 감소했다. 관료는 서툴렀고, 법은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 금고는 텅 비었다. 왕은 노예가 됐고, 판사들은 바보가 됐으며, 군대는 흩어졌다.”

프랑스 혁명 이듬해인 1790년 근대 보수주의의 원조로 평가되는 영국 하원의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혁명 직후의 프랑스를 비판하며 썼던 말이다. 지금 한국의 보수정당은 230여년 전 영국 하원의원의 진보 비판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문재인정부를 겨냥한 독설이 대개 이 범주를 못 벗어난다. 이 정부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통을 단절시키고 있으며, 적폐청산을 빌미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있다. 세금 퍼주기 복지정책으로 경제는 난장판이 됐으며, 안보는 갈수록 위태로워진다는 논리다. 보수가 진보를 비판하는 핵심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효과가 신통치 않다. 보수정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보수정당이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레퍼토리가 없어서다. 대표적인 게 북한 위협론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무력 도발을 계속하니 미국 주도 하에 강력히 제재하면 북한이 무너지고 흡수통일이 가능하다는 시나리오다. 아직 실현된 적이 없으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적이거나 혁신적이지 않다. 갑자기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시작한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난다면, 남북이 공존하는 체제가 구축된다면, 레퍼토리 변주가 쉽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당시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해빙을 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보 성향 대통령보다 보수 성향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이 더 얻을 것이 많다는 예측이 나왔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대로 돌아가는 해법을 선택했다.

전통적인 대북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수정당의 대북 위협론은 통일에 무관심해진 20, 30대의 귀를 잡을 수 없다. 통일과 관련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젊은 세대는 북한을 미워하거나 무서워하기보다 관심이 없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관심 없는 사람 얘기를 계속하니 대화가 지루할 수밖에 없다. 20, 30대에서 보수정당 지지율이 낮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퍼주기 공세도 생각해볼 문제다. 국민들에게는 북핵 문제보다 생활비가 더 절박한 문제다. 북한 핵·미사일은 남의 나라 얘기지만 비정규직과 최저임금, 병원비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문재인정부가 해법으로 제시한 소득주도 경제성장론, 복지 확대론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이 검증되지 않은 경제적 실험이라고 비판하고, 아직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국민 세금으로 공무원 일자리만 늘리는 것 아닌가”라는 얘기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시도했던 낙수효과 경제성장론, 747 성장론, 창조경제론이 실패로 끝난 마당에 새로운 시도는 불가피하다.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말로 과거 성공담을 얘기해봐야 먹히지 않는다. 차라리 지난 대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중부담·중복지 공약은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했다.

보수정당은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대북 문제든, 경제 문제든 오래된 곡조를 바꿀 때가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은 왼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집권을 위해 진보는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보수는 왼쪽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지금 한국의 보수정당은 너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기만을, 측근 비리가 터지기만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실수만을 기다려서는 답이 없다.

남도영 정치부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