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 특별전’ 작품 해설 맡은 남경주 “귀에 쏙쏙 박히는 해설하려 고민하면서 녹음”

입력 2018-01-01 20:24
최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뮤지컬 배우 남경주. 그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을 관람하면서 감동을 받았다. 나의 인생까지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당신이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을 찾았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입장권을 산 뒤 3000원을 내고 작품 해설이 담긴 오디오 가이드 기기를 대여할 것이다. 그리고 설레는 기분으로 전시장에 들어선다. 그 순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저도 한때는 조각을 전공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전시가 남다르게 다가오는데요, 특히 얇고 가느다란 형태를 한 자코메티 조각을 보면서 매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배우 남경주(54)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 열리고 있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회고전을 빛나게 만들고 있는 숨은 주역 중 한 명. 최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남경주를 만났다. 그는 “어떻게 말을 하면 귀에 쏙쏙 박히는 해설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녹음에 임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TV 프로그램 내레이션을 맡은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부담이 되진 않았어요. 가장 차분하게 말하자는 생각으로 오디오 가이드를 녹음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자코메티를 좋아했던 만큼 제게 ‘공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오디오 가이드에 녹음된 내용처럼 그는 10대 시절 조각가가 꿈이었다. 서울 환일고에 진학한 고교생 남경주의 눈에는 흙이나 물감이 묻은 검정색 작업복 차림의 선배들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이 학교 조소반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이었다. 남경주는 조소반을 찾아갔다. 작업실 한쪽에는 기기묘묘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진흙도 쌓여 있었다. 그는 조소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당시 조소반을 지도하던 인물은 조각가 김영원(71)이었다. 김영원은 훗날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한국의 대표 조각가 중 한 명이다.

“선배들한테 엄청 맞으면서 조소반 활동을 했어요. 하지만 김영원 선생님은 저를 예쁘게 봐주셨죠. 제가 꼼꼼한 편인데, 그런 점을 대견하게 생각해 주셨어요. 홍익대 미대에 가려고 준비도 했어요. 그런데 미술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각보다는 연기를 하고 싶더군요. 무대에 서는 삶을 상상해보니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결국 진로를 틀어 서울예대에 진학했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거죠.”

자코메티는 남경주가 고교 시절부터 흠모한 예술가였다. 그는 “책에서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전까지 알던 조각상은 사실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자코메티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거칠지만 감각적이었다”며 “흙을 뚝뚝 떼어서 붙인 듯한 작품들을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조각가와 배우의 삶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남경주는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보다 걷어내는 게 중요할 때가 많은데, 그건 조각이나 연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를 할 때 ‘장식’이 많이 달린 연기는 잠깐만 훌륭해 보일 뿐 ‘핵심’을 전달할 순 없어요.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걷어낼 때 여백이 생기면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데, 자코메티 같은 조각가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남경주는 최근 전시장을 찾아 자코메티 작품들을 관람했다. 그가 꼽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자코메티의 대표작인 ‘걸어가는 사람’(1960). 남경주는 “좋은 작품은 소설이건 미술 작품이건 시대를 뛰어넘어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며 “전시장에서 마주한 ‘걸어가는 사람’도 그런 케이스였다”고 말했다.

“저는 농부들을 굉장히 존경해요.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농부들의 얼굴이나 손에 새겨진 깊은 주름, 그런 주름들이 자코메티 작품에서 보이는 것 같았어요.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는 ‘나도 저 조각상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남경주는 오디오 가이드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특별전을 찾을 많은 관람객들에게 격려나 위로가 될 만한 내용이다.

“자, 여러분 저와 함께 다시 한번 힘을 내서 걸을 준비가 되셨나요? 아무에게도 말 못할 어려움이 있을 때 왜 이렇게 나만 힘든 걸까 생각한 적이 많은데요, 앞으로는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힘을 내서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