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관객, 작품의 질문을 받다… ‘블라스트 씨어리’展

입력 2018-01-01 05:00 수정 2018-01-01 18:09
블라스트 씨어리의 영상 작품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의 한 장면. 2013년 작. 싱글채널 비디오, 11분.

英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신작 등 영상작품 7점 내놔
미술의 역할 등 메시지
3월 4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


“제가 권력을 쥐어요? 한 번도 없었어요. 광화문 집회에 나가도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는걸요.”

영국 3인조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블라스트 씨어리’(Blast Theory·이론을 혁파하라는 뜻)의 신작 영상 작품 ‘앞을 향한 나의 관점’에는 서울 광화문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느리게 펼쳐진다. 화면 위로는 한국인 여성이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흘러나온다.

미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 변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전시장의 관객은 멋있는 작품을 감상하며 소비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것인가. 경기도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블라스트 씨어리-당신이 시작하라’ 전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의미 있는 모색이다.

1991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블라스티 씨어리 멤버들의 이력은 독특하다. 매트 애덤스는 연극, 주 로우 파는 현대무용, 닉 탄다바니치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순수 미술이 아닌 ‘엉뚱한 영역’에서 온 이들은 현대미술판에서 차별적인 행보를 보였다. 연극 라디오 게임 웹 실시간스트리밍 등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해 인터랙티브 작업을 펼쳐왔다. 관객을 끌어들여 전시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주체로 바꿔버린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수여하는 ‘2016년 국제예술상’을 수상한 이들이 1년여 준비 끝에 마련한 이번 전시에 나온 7점의 작품도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2017년 신작 ‘앞을 향한 나의 관점’은 런던박물관 후원으로 제작됐는데, 끝부분에 한국의 모습을 추가했다. 작가들은 ‘당신이 가장 권력을 쥐어본 순간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한국인들을 인터뷰했다.

관객은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이 영상 작품 앞에서 처음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곤 작품에 빠져들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블라스트 씨어리는 작품마다 질문을 던진다. 영상 작품 ‘2097: 우리는 스스로를 끝냈다’는 인류의 미래와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과연 기술결정권을 쥘 수 있는가를 묻는다. ‘율리케와 아이몬의 타협’은 우리가 폭력을 당했을 때 폭력적인 수단으로 대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적극적으로 사회 혁신을 위해 마치 활동가처럼 나서기도 한다.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은 2013년 일본의 아이치현에서 제작된 것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 여파로 버려졌던 폐선을 마을 주민과 함께 개펄에서 끌어올리는 퍼포먼스를 기록했다. 재난의 현장에서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모두가 노력을 하는 ‘재난 유토피아’를 보면 순간, 울컥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시 제목 ‘당신이 시작하라’는 선동적이다. 21세기의 민중미술은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되묻게 된다. 3월 4일까지.

용인=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