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지난해 총선 직후
조선·해운 지원 위해 밀어붙여
발권력 동원 부작용 논란 속
결국 대출방식으로 11조 조성
사용실적 ‘0’로 자동폐기 수순
박근혜정부 시절 한국은행이 돈을 더 찍어 불황에 빠진 조선·해운업의 재벌 대기업 회생을 돕자는 이른바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가 사용 실적 ‘제로(0)’의 촌극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평가다.
한은은 28일 내년도 통화신용정책 운영 방향을 확정하고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을 거쳐 이를 공표했다. 내년에도 통화정책 완화 기조를 유지하고 추가 기준금리 인상은 지극히 신중히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금통위 안건에는 올해 말로 일몰인 11조원 규모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운영안이 아예 상정되지도 않았다. 금통위원들은 사용 실적이 전혀 없는 이 자본확충펀드를 연장할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를 이루었고, 오는 31일로 자동 폐지되도록 그냥 두는 절차를 밟았다.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는 지난해 4월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강봉균 당시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이 “한국판 양적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한 게 모태다. 남해안 표심이 걸린 조선·해운업 회생을 위해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돈을 풀어야 하는데, 그 재원이 모자라니 한은이 윤전기로 돈을 새로 찍어 대라는 게 핵심이다.
일단 한은의 발권력이 동원된다면 일차적 수혜는 구조조정 위기에 놓인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 재벌 대기업에 돌아가고, 돈의 남발로 인한 물가 상승 피해는 전 국민이 무차별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 벌어져 실현 가능성이 낮아보였다.
더욱이 새누리당의 4·13 총선 참패로 물 건너가는 듯했던 이 발상은 선거 열흘 남짓 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다시 주목받게 됐다.
이주열 총재는 당시 한은 간부들에게 직을 걸고 막을 방침임을 천명했으나 청와대와 금융 관료들의 입김이 강해 결국 캐피털 콜 방식으로 국책은행이 한은에 빌려 쓰는 방식으로 최종 결정됐다. 산은, 수은이 한은에 대출을 신청하면 도관은행인 기업은행을 거쳐 특수목적법인에 돈이 흘러가는데 이때 신용보증기금에 보증 책임을 지우는 등 복잡한 단계를 거치도록 했다. 복잡한 절차는 또 비용 상승을 불러와 산은 수은으로서는 자본확충펀드보다 스스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게 훨씬 저렴한 상황으로 이어져 결국 펀드를 단 1건도 이용하지 않는 촌극으로 마감됐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실 기업에 돈을 넣으려면 정부가 국민 대표인 국회의 의결을 거쳐 재정으로 해결해야지 이를 우회해 한은의 발권력으로 대처하려는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고 평가했다.
글=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한국판 양적완화’의 흑역사… 자본확충펀드 퇴장
입력 2017-12-29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