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기억을 탈색해 지워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예외적인 기억들도 있다. 그에겐 2009년 4월 30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120호 특별조사실에서의 하루가 숙명처럼 각인됐을 거 같다. 검찰청으로, 법정으로 향하는 호송버스 안에서 그의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그날까지 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해서 한 조사였나. 그 일로 내 인생도 어긋났다. 지금에 와 나를 이렇게까지 내몰아야 하나…’ 포승줄에 묶인 몸을 내려다보면서 노여움과 괴로움, 분노가 섞인 복잡한 상념에 젖어 있을 그의 모습이 가끔 그려진다.
그날 우병우 중수1과장은 창가 쪽에 햇빛을 등지고 앉았다. 그는 ‘박연차 게이트’의 주임검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태웠다. 우 과장은 “지금부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 혐의 피의자로 조사하겠습니다”라며 조사 동의서를 내밀었다. 노 전 대통령은 천천히 ‘노무현’이라고 서명했다. 훗날 자서전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회고했던 문재인 변호사가 그 옆을 지켰다. 그 23일 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생을 끊었다. 자택 컴퓨터 바탕화면에 영결의 글을 남겼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우 과장은 4년을 더 검찰에서 일했다.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중수부 수사기획관 등을 거쳤지만 검사장은 되지 못했다. 두 번이나 승진에서 미끄러지자 사표를 던졌다. ‘노무현 수사 검사’란 주홍글씨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 탓이라고 그는 여겼다. 억울해했고, 조직을 원망했다. “일만 있으면 저를 불러서 부려먹고는 승진은 다른 놈 다 시켜주고. 1차에 안 시켜준 것만 해도 열 받는데 2차까지 안 시켜주니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했어요.”(신동아 2016년 9월호) 몇몇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러니 다시 권력의 자리로 불러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일생의 은인이었을 터다. 사정기관을 총괄하게 된 그는 칼을 휘둘러 보은했다. 그가 ‘사심 인사’를 한다는 얘기가 친정인 검찰 주변에 파다했다.
정권의 추락은 곧 그의 추락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오는 순간 표적이 됐다. 검찰과 정치권, 언론과 여론이 그를 쫓았다. 오랜 격언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반대의 경우였다. 범죄 혐의가 미처 입증되기도 전에 공분의 대상이 됐다. 네 번째로 검찰에 불려가던 날 그는 “내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자부심과 공명심으로 뭉친 그의 입에서 이질적인 ‘숙명’이란 말이 나왔다. 기어이 자신이 구속돼야만 수사도 끝날 거라는 걸 경험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그때도 그는 필사적으로 외부에서 이 처지의 기원을 찾는 듯 보였다. 8년 전 1120호 조사실에서 마주한 변호사가 대통령이 된 시대. 그날의 선명한 기억은 스스로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인식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노 전 대통령 수사가 이후 그의 인생 부침과 결부돼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가 지금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됐나. 그를 감옥으로 보낸 진짜 힘은 대중의 끝 모를 적개심과 분노, 야유였다. 검찰이 다른 사람을 1년에 5번 조사해 3번이나 구속영장을 쳤다면 필시 표적·과잉수사 비난이 일었을 거다. 다수가 이를 용인하고, 오히려 추동한 건 ‘우·병·우’이기 때문이다. 권력, 명예, 욕망이 실린 수레를 끈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가 뱉은 숙명은 그가 걸어온 길이자 그가 심은 이미지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성탄절 날 법원에 구속적부심사 청구서를 냈다. 자신을 버려야 산다는 걸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지인들도 “좀 참지…”라고 한탄했다. 청구는 기각됐고, 그는 2018년을 구치소 독방에서 맞게 됐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다.
지호일 사회부 차장 blue51@kmib.co.kr
[세상만사-지호일] 우병우, 그 숙명의 기원
입력 2017-12-28 19:11 수정 2017-12-28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