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대부분은 배경음악 등 고려
안무가·디자이너와 논의 후 선택
김연아, 밴쿠버올림픽 출전 땐
007 테마곡에 맞춰서 의상 제작
일부 “점수에 영향 주는 건 부당
공정한 경쟁 위해 유니폼 입어야”
1990년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피겨 요정’ 토냐 하딩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아이, 토냐(I, Tonya)’의 예고편 동영상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완벽한 연기를 펼쳤지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하딩이 심판진에게 달려가 항의한다. 그러자 한 심판은 볼품없는 분홍색 의상을 입은 하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우리는 표현력에 대해서도 점수를 매겨” 하고 말한다. 하딩의 코치는 돈이 없어 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고 출전한 하딩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괜찮은 의상을 입고 있다면 심판들이 좋은 점수를 줄거야.” 피겨스케이팅 의상이 단순한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의상은 연기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일본의 하뉴 유즈루가 2014 소치동계올림픽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입었던 의상은 3000달러(약 322만원)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출전한 대회마다 ‘베스트 코스튬’으로 뽑혔다. 김연아가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007 테마곡에 맞춰 ‘본드걸’을 연기했을 때 입은 의상은 장식에만 20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한 외국 해설가는 이 의상을 보고 “마치 구스타프 클림트(오스트리아 화가)의 그림 같다”고 감탄했다.
그렇다고 김연아의 의상이 아주 비싼 것은 아니었다. 밴쿠버올림픽 때 김연아가 입었던 의상은 약 160만원대였다. 당시 일본의 아사다 마오가 입었던 의상은 약 210만원으로 알려졌다. 피겨 의상 제작엔 선수, 안무가도 참여한다. 디자이너는 배경음악을 듣고 선수의 연기 영상도 본 뒤 선수, 안무가와 함께 색깔 등을 논의해 의상을 만든다.
피겨 선수들은 표현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중하게 의상을 선택한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기대주인 최다빈은 지난 2월 강릉에서 열린 국제빙상연맹(ISU)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 배경음악을 영화 ‘라라랜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바꿨다. 의상도 영화 여주인공이 입은 드레스와 같은 녹색으로 교체했다. 새 의상을 입은 최다빈은 쇼트프로그램에서 자신의 ISU 대회 최고 기록(61.62점)을 세웠다.
피겨스케이팅 의상에 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선정성이다. ISU 규정 501조에 명시된 복장에 관한 규정엔 ‘야하고 과장된 디자인은 배제해야 한다’, ‘과도한 노출은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는 참고사항일 뿐이다. 일부 선수들은 심판진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파격적인 의상을 입기도 한다. 전 국가대표를 지도한 한 코치는 “심판도 사람이다 보니 두 사람이 똑같은 연기를 해도 연기에 더 잘 아울리는 의상을 입은 선수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해외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상이 점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당하다”며 “공정한 경쟁을 위해 선수들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미국 피겨의 마리사 카스텔리는 “음악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어야 피겨라는 스포츠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항변했다.
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인 동시에 공연예술로 불린다. 이것이 피겨스케이팅 의상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어려운 이유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피겨 의상의 비밀… “연기의 일부” 점수에 반영되기도
입력 2017-12-29 05:00